1. 머리말
2. 기존 견해에 대한 검토
3. 沸流說話에 보이는 沸流와 彌鄒忽
4. 맺음말에 대신하여-彌鄒忽 仁川說의 문제와 대안-
요약
溫祚와 함께 남하하여 백제를 건국한 것으로 알려진 비류는 초기 백제의 역사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이는 비류를 포함한 비류계가 백제의 왕위 계승을 둘러싼 문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미추홀의 위치에 대해서는 『三國史記』地理志 이후 의심할 여지없이 인천으로 비정되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牙山說에 이어 楊州古邑說마저 제기되어 이에 대한 의문이 확대되고 잇는 실정이다. 이는 인천 지역에서 미추홀로 확정지을 만한 초기 백제 유적이 발견되지 않는 점에서 기인할 것이다. 이에 아산의 미추홀은 백제 때 명칭이기 때문에 백제 때 牙述縣과 미추홀과의 연관성을 찾기 힘든 점과 미추홀이 밀두리로 음이 변했다면 'miju'가 ‘miltu'로 변한 것으로 보아야 하는데, 이러한 음의 변화는 불가능하다 한다. 현재의 양주와 파주 일대에 해당하는 양주고읍설을 주장한 견해는 광개토대왕이 공략한 58성이 반드시 일정한 원칙을 가지고 서술된 것이라고 단정 지을 수 없고, 인주 이씨에 의해 미추홀 지역이 강조되었을 개연성은 충분하지만 이것이 인주 이씨에 의해 조작되었다고 말해주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유의한다면 양주고읍설 또한 원 사료를 부정할 만한 결정적인 근거가 없는 것이다. 미추홀 세력은 온조계와 비견할 정도의 세력을 한동안 유지하였다. 따라서 온조가 남하할 당시에 마한왕이 동북 지방의 1백리 땅을 주었다는 기사를 주목하면 미추홀도 대략 方百里의 규모에서 찾는 것이 온당하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점에서 문학산 주변과 동으로 인천의 진산인 소래산에 이르는 넓은 지역으로 보려는 견해는 주목된다. 아울러 최근 문학산 일대 지표 조사에서 백제 유적이 발견되고 있는 점은 고무적이다. 이곳은 일제 강점기에 제작된 지도상에서 볼 때 구릉의 동쪽면과 인접한 곳까지 바닷물이 들어왔을 것으로 추측되기 때문에 백제인들의 생활 유적이 존재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문학동과 선학동 일대는 지금과 달리 백제시대에는 바닷가와 인접한 지역으로 추정되므로, 미추홀의 실체를 밝혀낼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될 것이다. 문학산 일대를 중심으로 영종도 일대 등 方百里의 거리에 들어오는 지역 중에서 해안가와 관련 있는 지역을 잠정적인 미추홀의 실체로 보고, 문화 유적의 보존과 발굴에 세심한 배려가 있어야 할 것이다. 이러할 경우 백제 유적지를 발견한 것에 그치지 않고 풍납토성의 경우와 같이 백제 초기 미추홀의 실체를 밝혀낼 수 있으리라 기대된다. (연구원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