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머리말
Ⅱ. 復興運動의 진압 과정과 5都督府
Ⅲ. 新羅와 唐의 각축과 熊津都督府
Ⅳ. 新羅의 百濟故地 지배와 完山州 설치
Ⅴ. 맺음말
요약
완산주 설치 배경을 중심으로 신라의 백제고지 점령 정책에 대해 검토하였다. 먼저 부흥 운동의 진압 과정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부흥 운동은 처음 舊都城을 중심으로 일어나 豆良尹城전투에 승리함으로써,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이에 부흥군은 扶餘豊을 왕으로 모시는 등 국가 체제를 갖추지만, 내분에 휩싸였다. 그 결과 나당연합군은 663년 9월 백강 전투의 패배로 궁지에 몰린 부흥군을 제압하고, 百濟故地를 평정하였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百濟故地를 장악하게 되자, 당은 신라가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을 막고자 하였다. 당은 한성 지역에서 벌어진 반란에 개입을 하는 등 신라 내부의 분열을 책동하였고 신라는 안승의 고구려 유민을 舊百濟의 중요 지점이었던 金馬渚에 안치시켜 대리전의 양상을 띠게 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671년 신라는 百濟故地의 땅을 모두 차지하게 되었다.신라의 百濟故地 점령은 이와 같은 과정을 거치면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정책 수립에 이러한 과정이 그대로 반영되었다. 완산주가 현재의 전주 지역에 설치된 것이 이를 보여준다. 완산주는 두량윤성 전투에서 부흥군이 승리하자 남방의 여러 성들이 부흥 운동에 가담한 사실과 관련이 있다. 두량윤성에 대한 위치 비정을 검토한 결과 기존의 견해는 이를 전하고 있는 상황과 어긋났다. 그런데 전주의 屬縣인 杜城縣은 백제 시대의 豆伊縣으로, 두량윤성으로 불리어졌을 가능성이 많았다. 이를 두량윤성으로 비정할 경우 이 전투 당시에 신라군이 남쪽으로부터 북상한 상황과 일치하였다. 또한 전투 이후 신라의 퇴각로와 구원군의 진격로와도 일치된다. 이를 통하여 신라는 남방 루트를 활용하였던 것이 확인된다. 따라서 두량윤성 전투 이후 남방의 여러 성들이 부흥군에 가담한 것은 이들 성이 이 교통로에 위치하였던 사실과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신라는 大耶州를 설치함으로써 남방 루트를 확보하고자 하였으며, 부흥군 또한 避城에 천도함으로써 남방 지역의 호응을 유도하였다. 결국 신라는 663년 2월의 전투에서 남방 루트를 장악하며, 이는 백제 부흥군의 결정적인 쇠퇴를 가져왔다. 그리고 부흥 운동을 진압하면서 남방 지역의 확보가 최대의 현안으로 등장함에 따라, 전주 지역이 부상하게 되었다. 아울러 신문왕 5년 완산주를 다시 설치하였다는 기사는 州의 이동과 관련이 있었다. 신라는 창녕에 比斯伐州를 설치한 이후 大耶州와 居列州를 거쳐 최종적으로 完山州를 설치하였다. 이와 같은 州의 이동은 신라의 서진 정책의 결과였다. 따라서 창녕과 전주가 古號를 공유하는 것은 서진 정책이 완료된 의미에서 처음 창녕에 붙여진 주의 이름을 전주에 다시 붙여 이를 기념한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된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