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사에서 관시의 대상이 되고 있는 다양한 분야 가운데 하나가 백제 멸망기에 대한 연구라고 할 수 있다. 이 가운데 부흥운동과 관련된 연구는 백제의 멸망이라고 하는 부정적인 측면의 부각으로 인한 부담감 때문인지 자료의 풍부함에 비해 연구가 그리 활발한 편은 아니다. 그런데 부흥운동기에 활동한 여러 인물 가운데 주목되는 사람은 흑치상지이다. 비록 흑치상지가 나당군에 항복, 임존성에서 최후가지 항거하던 부흥군을 공격하여 백제 부흥운동에 종지부를 찍은 인물이기는 하지만 그와 관련된 기록은 백제사에 있어서 여러 부분을 밝히는데 있어서 많은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다.
이 글에서는 흑치가의 성립과 변천을 백제 지방통치제도의 변천과정 속에서 살펴보았으며 흑치가가 처음 분봉된 흑치지방이 어느 지역인가를 검토해 보았다. 아울러 백제멸망기의 정국상황 속에서 지방세력이었던 흑치상지의 활동을 통해 그의 정치적 성격을 찾아보고자 하였다. 먼저 흑치가는 부여씨에서 분지화하여 흑치지방을 씨로 삼게 됨으로써 흑치씨를 칭하게 되었으며 이곳을 재지기반으로 대대로 유력세력으로 존재하게 되었다. 흑치가가 이곳에 토착하는 시기는 왕족의 정치적 위상이 강화되고 담로제가 정착되는 동성왕 12년을 전후한 시기로 추정된다. 그리고 흑치지방은 상지가 부흥운동을 일으켰던 임존성이 위치하고 있는 예산지역으로 비정하는데 무리는 없다. 이때 주목되는 점이 삽교천 유역 주변에 검다는 뜻을 지닌 지명이 다수 남아있다는 점과 예산지역의 백제시대 지명이 검은 산이라는 의미를 가진 오산이었다는 점이 참고된다.
다음은 백제사상에서 흑치상지의 정치적 성격과 위치를 조망해 보았다. 비록 그는 백제 멸망기에 부흥운동을 전개하였으나 결국 당에 항복하여 백제 부흥운동에 종지부를 찍는데 일익을 담당하였다. 이는 그가 비록 당에서 뛰어난 무공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백제사상에서 그에 대한 평가는 여전히 제한적일 수 밖에 없는 점이기도 하다. 다만 그와 관련된 연구가 백제 지방통치제도의 변화를 살펴보고 당시 지방세력의 존재양태를 이해하는데 실마리를 제공해주고 있다는 점에서 백제사에서의 그에 대한 평가와는 별개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필자 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