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머리말
Ⅱ. 백제국의 성립
Ⅲ. 주변세력의 병합
Ⅳ. 비류계의 근거지와 북부·서부
Ⅴ. 西部의 설치
Ⅵ. 중앙세력과의 관계
Ⅶ. 맺음말
요약
백제가 2세기 이후에야 건국·성장하였고 백제의 부는 중국의 영향을 받아 설치한 통치기구로서 중앙의 질서를 지방에 관철하는 데 이용되었다는 관점에서 서부 문제를 검토해보았다. 백제의 건국설화가 유독 사실적이면서도 내용이 다양하며 온조·비류·구태 등 건국 주체조차 다르게 묘사된 점은 백제가 여러 세력을 통합하였고 내부적으로 주도권이 몇 차례 바뀌었음을 시사한다. 즉, 한강 하류지역의 백제국이 주변의 소국들을 병합하며 마한 내에서 두각을 나타낸 사실을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삼국지 한전 등의 문헌과 근래의 고고자료를 검토하면 대략 3세기말~4세기 초엽에 온조계가 비류계 등을 병합한 듯하다.
비류가 미추홀에 정착하였고 미추홀은 지금의 인천에 비정한다. 그러나 인천에서는 이에 걸맞는 유적을 아직 찾지 못하였다. 이미 유적이 파괴되었거나 조사가 미진할 탓이 아니나 지금의 인천지역은 나말여초의 신도시이며 미추홀은 원래 양주고읍에 해당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추홀의 비류계는 위례성을 기준으로 보았을 때 서쪽에 거주한 것이 아니라 북쪽에 거주하였떤 셈이다. 당연히 백제에 흡수된 비류계는 서부가 아니라 북부에 속하였을 터이다.
백제의 서부는 지금의 화성지역에 있었다. 문헌자료는 영성하지만 풍부한 고고자료가 그것을 입증한다. 특히 마하리·백곡리 고분군과 발안리 마을유적은 서부의 근거지를 시사하기에 충분한 자료이다 모두 중심연대가 4세기 무렵이며 늦어도 5세기 초엽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4세기 무렵 백제 서부의 중심지가 남양만 일대에 있었던 것이다.
서부 집단의 문화기반과 전통은 백제 왕실과 달랐다. 이는 그들의 중심묘제가 석곽묘 내지 수혈식 석실묘로서 같은 시기 백제 왕실의 적석총·쩍석토축묘와는 여러모로 발상 자체가 크게 다르다는 점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출토된 토기는 두 지역 사이에 전혀 차이가 없었다. 제작기법을 비롯하여 태토·기형·문양까지 같았다. 서부는 백제의 왕실과 정치·경제·문화적으로 긴밀히 연결되었던 것이다.
지금의 화성 남양만 일대가 백제 서부의 근거지였다면 백제의 부는 다른 지방세력을 중앙의 일원적 질서체계 속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설치한 것이며 적어도 4세기 무렵에는 중국 부제와 기능상 흡사했을 것이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