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머리말
Ⅱ. 小政治體들의 성장과 ‘支半國’의 등장
Ⅲ. 百濟와 馬韓의 대립과 ‘지반국’의 상황
Ⅳ. '支半國'에서 '皆火ㆍ欣良買縣'으로의 전환과 발전
Ⅴ. 맺음말
요약
고대 시기의 부안은 기원전 3세기경부터 한반도 남부 지방에서 성장하기 시작한 마한 54국 중의 하나인 지반국으로 추정되며 백제가 건국, 성장하던 서기 1~3세기 사이에도 금강 유역과 그 이남 지역에서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하던 마한 연맹체의 일원으로 존속하였다.
그러나 서기 4세기에 접어들어 백제는 전북 김제지역가지 진출하였고 마침내 근초고왕 24년 남방 정벌로 낙동강 유역과 남해안 일대를 평정하자, 지반(부안)은 주변 세력들과 함께 백제에게 항복을 하게 된다. 이는 곧 백제가 전라도 서남해안 일대까지도 영역화 한 것을 의미하는데 부안의 입장에서 보면 비로소 백제의 한 지방으로 편입된 것을 뜻한다.
그리고 이를 토대로 부안은 백제의 중요한 정치, 군사, 해양의 요충지로서 자리잡게 되는데 이를 반증하는 것이 출토된 유물의 시기와 문헌 기록으로 볼 때, 백제의 근초고왕 때로 추정되는 죽막동 유적이다. 이 유적에서는 중국 남조와 교류를 통해 얻어졌을 청자이부반구호가 출토되었는데 이런 종류는 서울 몽촌토성, 석촌동, 천안 화성리 토광묘, 공주 무령왕릉, 부여 부소산성 내 토광유구, 익산 입점리 고분 등의 백제 중요 유적에서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부안 죽막동 지역도 백제 중앙 권력과 긴밀한 관계로 연결되어 있음을 추측할 수 있다.
또 죽막동 유적에서 발견된 유물에는 서기 5세기 후반~6세기 전반에 걸친 가야계통 금속 유물도 있어 대가야가 중국과 교류할 때. 어떠한 형태로든 이 지역을 하나의 통로로 이용하였던 것이 아닌가 한다. 그렇다면 백제 시대 부안 지역이 중국과 교류를 하는 중요 창구 역할을 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나아가 사비시대 전북지역의 비중이 더욱 커져 익산은 수도의 물망에 오르내리고 고사성은 5방 중의 중방으로서 지방 제도의 중핵적 위치와 기능을 수행하였다. 따라서 인접한 부안 지역도 여전히 활발한 대외 교류의 창구로써 위치를 유지하였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