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부흥운동을 주도했던 상층부의 움직임이나 주요 거점 중심의 전개양상에서 벗어나 부흥운동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을 각 지방의 양상 특히 연기 지방에서의 부흥운동 모습을 구체적으로 파악해보고자 한다. 기존 연구에서는 명문자료를 통해 백제 유민에 대한 지배정책과 관련하여 새롭게 다루었으나 백제 유민에 대한 관등 수여에 미친 영향에만 주목하였을 뿐 연기 지방 백제 부흥운동과 관련하여 적극적으로 분석하지 못하였다.
연기가 속한 웅주 지역이 백제 부흥군 활동이 가장 심했던 지역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연기지방은 북으로는 천안, 동으로는 보은, 청주지역으로 연결되는 군사와 교통상의 요지이기 때문에 주류성이 연기에 있다는 주장이 있기도 하였다. 신라의 중요 수송로인 금강수로가 연기를 관통하여 흐르기 때문에 신라 보급로를 차단하는 일정 역할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특히 계족산성 중심으로 옹산성, 우술성, 지라성 등을 확보한 백제부흥군이 웅진도를 차단하고 이때 인접한 연기지방도 상당한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백제부흥군이 662년 8월 지라성 등 웅진 동쪽 거점성들을 상실하면서 나당연합군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비암사의 불상 명문은 백제 유민에 대한 차별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데 이는 웅진도독부를 기반으로 새롭게 전개된 부흥운동에 연기지방 백제유민들이 관여하였기 때문이다. 백제의 일원화된 관등체계에 익숙했던 재지세력은 신라의 경위, 외위 일방적 수여에 반발하였다. 이에 신라는 외위를 소멸하고 재지세력은 새로이 경위로 일원화된 관등을 받았다. 중앙세력 특히 대성팔족 출신임에도 낮은 관등을 소지한 것은 지방사회에 대한 이들에 지배력을 크게 약화시키려고 한 신라 중앙정부의 의도에서 비롯된 측면이 아닐까싶다.
673년 불상 조성의 의미는 아미타신앙이 근본적으로 현실에 비판적이나 동시에 이에 적응하는 또 다른 일면도 내포하고 있어 신라 왕권에 비판적이지만 실제로는 오히려 타협적인 국면을 나타내게 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으로는 사상적 측면에서 신라 중앙정부가 백제 불교를 융합하고자 한 측면 즉 백제 유민을 복속시키는 정책과 함께 백제 불교도 함께 흡수하려 노력하였던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신라인과 옛 백제인을 차별한 신라의 대백제 유민정책은 중대말 이후 백제 유민들로 하여금 다시 백제 부흥운동을 일으키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하였을 것이다.(연구원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