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머리말
Ⅱ. 왕인의 구림 출생설과 그 眞僞
Ⅲ. 백제의 대왜교섭과 상대포의 위상
Ⅳ. 왕인의 왜국 이주와 활약
Ⅴ. 맺음말
요약
왕인은 백제에서 천자문과 논어 등과 선진문물을 갖고 건너가 일본 고대문화 발전에 기여한 사람으로 순수 백제인이 아닌 중국계 이주민의 후손이었다. 그러나 군현지역에 거주한 왕씨가문 출신이며 속일본기에 조부인 왕구가 백제로 이주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왕구는 근초고왕이 대방지역을 공격하여 차지한 때를 전후하여 백제로 이주하였으며 왕인은 유학에 정통한 가문의 전통 속에서 성장하였기에 박사에 임명될 수 있었다. 따라서 왕인은 구림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며 출생설화와 관련 유적들은 도선국사의 것을 차용한 것에 불과하다. 일제시대 이후 영암 구림이 왕인 출생지로 알려졌다. 구림과 가까운 곳에 위치한 영산포는 미곡수탈을 위한 중요 포구로 이용되며 일본과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영산포 일대 많은 일본인들이 거주하며 문화교류가 활발해지고 구림은 왕인 탄생지로 알려졌다.
이처럼 왕인의 구림출생설은 후대의 산물에 불과하나 구림의 상대포에서 도왜하였다는 주장은 허구만은 아니다,. 상대포는 1970년대까지 중소형 선박 통행이 가능했고 고대 영산강을 따라 바닷물이 들어온 내해에 위치하였다. 구림은 백제시대 해상활동과 문화교류의 중심지였으며 수도 한성에서 가야, 왜로 가는 사절이나 선박 항해에 적절한 날씨나 조류를 기다리는 중간기항지였다. 구림의 상대포는 수도 한성과 가야를 연결하는 중요 포구였기에 백제가 직접 관할하였다. 왕인은 왜의 초빙을 받아 한성을 떠난 후 백제가 관할하는 상대포에 도착하여 상당기간 머물렀을 가능성이 있다. 후대에 이르러 구림이 왕인의 출생지로 알려지게 된 것은 고대 해양 교류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구림지역의 지정학적 조건에 기인한다.
왕인은 왜국으로 건너가 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왕인이 정착한 곳은 백제계 이주민이 많이 거주하던 대화국의 고시군이었다. 왕인이 이곳에 정착한 시기는 백제의 대왜교섭이 구주 중심에서 기내의 대화정권으로 바뀔 무렵이었다. 왕인의 도왜는 일본의 요청을 받아 백제 국왕이 보낸 것이 아니라 자발적 이주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왕인의 도왜와 왜국 정착은 일정한 기간이 지나면 후임자와 교체되어 귀국한 후대 박사들의 도왜 활약과 차이가 있다. 왕인은 백제에서 건너갈 때, 치공, 양주자 등을 데려가 일본 고대의 산업발전에 기여하였다. 또한 그의 후예들 중에는 중앙정계의 실력자, 지방 호족, 불교계 대승정, 문학자 및 탁월한 건축가 등이 배출되었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