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Ⅰ. 중국측 주요 사료
Ⅱ. 중국측 인식과 기억화
Ⅲ. ?삼국사기? 기술을 둘러싸고
Ⅳ. ?일본서기?에 보이는 백촌강 전투 기사
Ⅴ. ?일본서기?의 주유(州柔) 표기를 둘러싸고
Ⅵ. ?일본서기?의 규해(糺解) 표기를 둘러싸고
Ⅶ. ?일본서기?의 2가지 군편성기사를 둘러싸고
맺음말을 대신해서
요약
당의 동북아시아 전략과 유인궤의 백제정책을 고려하면 고구려구원과 백제부흥의 긴밀한 연대는 왜국내 고구려계의 집단에 의해 발의되고 이것을 왜국의 지배자층이 받아들이는 형태로 백강전투가 일어났다. 그러나 ?일본서기?의 관련 기록은 여러 사료가 복합적으로 채용되어 작성된 것이기 때문에 중국 및 한국측 기록과 비교·검토가 반드시 필요하다.
먼저 중국측 기록은 유인궤의 구체적 교전사실과 백제멸망 후 그의 백제정책 등이 주요 자료로 채택되었다. 한국측자료에는 나당군의 병력 및 교전, 이후 왜군의 퇴각이 강조되었다. 그런데 같은 ?삼국사기? 내에서도 백제본기와 신라본기의 기술은 약간의 차이를 보이는데 백제본기는 중국측 기록을 차용했고, 신라본기는 왜국보다 백제와의 전쟁에 좀더 비중을 두고 기술하였다.
한편 ?일본서기?의 경우, 백촌강 전투기사에 보이는 주유 관련 기사는 백제측과 왜측의 기록이 혼합되어 있다. 이는 백촌강 전투 이후 왜국으로 건너간 백제망명인들의 기록이 주요 사료가 되었고, ?일본서기? 편찬국에서는 이러한 기록을 매우 중시하여 기록하였기 때문에 용어의 혼란이 야기되었다. 규해 관련기사 역시 이러한 편찬과정상의 문제에서 비롯된 것으로 규해와 풍장은 동일인임을 알 수 있다.
결국 왜인에 의한 백촌강 전투의 정보는 풍장 또는 그 주변의 인물들, 왜국의 장군들 등에 의해 전해진 것이며, 여기에 나타나는 병법 등은 왜국이 고대국가를 완성하는데 필요한 정보이자, 그 원형이 되었던 것이다. (연구원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