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머리말
Ⅱ. 문주왕의 즉위배경과 곤지의 정치적 향방
Ⅲ. 문주왕의 사망과 해구의 정치적 향방
Ⅳ. 맺음말
요약
개로왕 이후 즉위한 문주왕은 국가존망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측근세력의 도움을 받으며 웅진 천도를 단행하지만 계속되는 내우와환으로 정국이 혼미하였다. 이는 국가 비상사태에 편승해 이루어진 문주왕 즉위로 이를 반대하는 세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 왕위계승 서열상 문주보다 높은 곤지가 왜에서 백제로 환국하면서 정치권에 큰 파장을 일으키며 반문주계가 곤지 중심으로 결집하였다. 곤지가 내신좌평에 제수된 것은 문주왕이 곤지로 하여금 유력귀족의 전횡을 견제하고 맏아들 삼근의 정치적 후견인으로 삼아 왕위계승을 공고히 하려는 목적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곤지의 귀국은 그의 정치적 의도에서 강행되었고 국내에 엄존한 지지세력에 의해 비호된 것으로 봐야 한다. 곤지의 영향력이 확대되며 문주의 왕권을 능가하게 되지만 오래지 않아 권력투쟁의 와중에 정적에 피살당한 것으로 짐작되며 이는 해구의 단독범행이 아니라 문주와의 교감을 통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해구는 백제 정국하 가장 요직인 병관좌평에 제수될 정도로 문주의 신임을 받던 최측근세력이며 삼근왕이 즉위하고 그 왕권 유지가 해구의 절대적지지 속에 이루어진 것은 그가 문주왕 시해와 무관하며 오히려 문주계 핵심 인물이라는 증거이다. 따라서 문주왕의 시해는 곤지 피살 후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곤지계의 조직적 반격이다.
해구는 문주왕 시해 이후에도 여전히 정국을 장악하였다. 진씨 중심의 곤지계의 갑작스런 정변으로 중앙에서 축출되며 대두성을 근거로 반란을 일으켰으나 해구는 진압당한다. 이때 삼근왕은 해구에 의해 옹립한 왕이라는 이유로 유폐시켰다 반란진압 후 폐위 혹은 시해하였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런데 일본서기와 삼국사기 기사를 비교할 때, 삼근왕은 곤지계가 일으킨 정변시 사망하였고 동성이 이 소식을 왜에서 접할 때 이미 왕위 계승자로 추대된 상태였으며 이후 백제로 귀환하여 즉위한 것으로 보인다.
웅진 초 백제 정국의 혼란은 문주계와 곤지계의 왕권을 둘러싼 정쟁에서 기인한 것으로 최종결과는 곤지계의 승리로 귀착되며 곤지의 적자 동성아 왕위에 즉위한 것이다. 그런데 삼국사기 문주왕~동성왕 즉위 이전의 모든 정치적 사건 원인제공자로 해구를 지목한다. 이는 정쟁 승리자가 승리에 대한 정당성 확보를 위해 조작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