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머리말
Ⅱ. 백제의 노령산맥 진출
Ⅲ. 백제의 섬진강 수계 확보과정
Ⅳ. 백제의 섬진강 수계진출과 남방정책 –맺음말을 대신하며
요약
웅진시대 백제는 수도의 함락에 의한 남천으로 국가의 위상이 급격히 하락되었다. 추락한 국력을 만회하는 방법 중에 백제가 취했던 정책은 곧 남방정책이다. 이는 영산강, 섬진강 수계에 진출하여 안정적 수운과 해양력을 확보하는 방향으로 설정되었다. 왜냐하면 수운을 포함한 해양력은 바로 국가경쟁력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백제가 섬진강 수계에 진출하기 위해서는 먼저 배후지를 점유한 후 점차 상류수계부터 진출해갔다. 먼저 섬진강으로 진출하기 위한 배후지로서 노령산맥 이북지역에 대하여 4세기 근초고왕의 남방정벌로부터 영향력이 행사되었다. 이와 같은 4세기 백제의 남정은 475년 웅진천도 이후 남방정책을 추진하는 최전선의 역할을 하였다. 백제는 노령산맥 이북지역에 기반하여 487년 임실을 시작으로 섬진강 수계에 진출하였다. 백제는 512년 섬진강 하류수계의 서족지역과 하구의 해역, 516년 기문 중심의 중류수계 그리고 529년 대사지역으로 대표되는 하류수계 전역을 영유하게 되었다.
그리고 백제의 섬진강 수계 진출과정 중 특징으로는 상류-중류-하류의 순차적인 형태를 띠지 않았다는 것이다. 512년 소위 ‘임나 4현’ 확보는 백제가 섬진강 중류수계 진출에 앞서 하류수계의 배후지역을 미리 선점하고 있었음을 말한다. 이것은 영산강 수계에 대한 백제의 영향력이 확보되었기에 가능하였다. 한편 백제가 섬진강 수계에 진출할 수 있었던 대외적 요인으로는 백제의 선진문물제공으로 동원된 일본측의 군사원조와 512년 이후 무령왕대에 유지된 고구려와의 전쟁휴식기간을 들 수 있다.
이와 같은 섬진강 수계 진출로 백제는 남부가야에 대하여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한 기반을 마련하였고 남부해안의 해양교섭능력을 향상시켰으며 대가야의 성장을 견제하게 된다는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 웅진천도 이후 약회된 백제의 국력은 영산강수계와 섬진강수계에 대한 확보를 발판으로 고구려와 대등한 위치로까지 향상되었던 것이고 521년 남조의 양이 무령왕을 영동대장군으로 제수한 기록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5세기 말에서 6세기 전반에 이루어진 일련의 수계망 확보정책 즉 나방정책이 어느 정도 진척된 시점에서 획득한 강국의 반열인 것이다. (연구원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