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머리말
II. 백제와 고구려의 대립과 영역의 변화
III. 광개토왕의 정벌과 백제의 대응
IV. 맺음말
요약
지금까지 「광개토왕비문」과 삼국사기의 관련 기사를 통해 서기 4세기말~5세기초의 백제 북방 영역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를 통해 近肖古~近仇首王 시기 이룩된 百濟의 盛世는 辰斯王(385~392)과 阿莘王(392~405)시기 고구려에 廣開土王(391~413)이 등장하면서 서서히 바뀌게 되었고, 이로 인해 백제의 북쪽 방어선은 일진일퇴를 거듭하는 지극히 유동적인 상황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그리고 진사왕 8년(392)에 이르러 고구려가 4만의 대병력으로 대대적인반격을 개시하자 백제는 더욱 더 수세에 몰리게 되어 石峴 등 10여성을 빼앗기게 된다. 하지만 아신왕의 등장과 함께 진사왕 8년에 빼앗긴 石峴 등浿水 주변의 10여 성을 재탈환하려는 시도를 끊임없이 추구되었다. 따라서삼국사기에 나타나는 辰斯~阿莘王 시기 백제와 고구려의 主戰線은 여전히 예성강 연변에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 그리고 이 예성강이 근초고왕이래 고구려의 남방 전투 한계 지점임을 감안해 본다면 광개토왕의 부단한 침공에도 불구하고 백제의 北境에는 별다른 변동이 없었음을 알려준다. 백제 한성시대 후기의 북방 영역 199이처럼 서기 395년까지도 백제와 고구려가 예성강을 사이에 두고 일진일퇴하였기 때문에 고구려에서는 「광개토왕비문」에서 볼 수 있듯이 永樂 6년(396)에 水軍까지 동원하여 백제에 대한 대대적인 토벌을 단행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이 당시 광개토왕이 親率하는 高句麗軍은 백제를 공격하여 58城을 攻取한 다음 阿利水를 건너 百濟 國城에 육박하여 아신왕의 항복을 받아내고 다시 北上하여 고구려로 돌아간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고구려에게 빼앗긴 백제의 58城 지역은 백제 國城의 북부 지역에 위치한다고 추정이 가능하며, 범위는 넓게 잡아도 한강 이북 유역과 인천을 잇는 선 이북까지로 한정될 수 있다.그런데 광개토왕의 정벌 이후 삼국사기기록에는 아신왕 7년(398) 8월에 고구려를 치려고 군사를 내어 漢山 北柵에 이르렀다거나, 개로왕 15년(469) 10월에는 雙峴城을 수리하고 靑木嶺에 大柵을 시설하고 北漢山城의士卒을 나누어 지키게 하였다는 기록이 나타난다. 따라서 이후 백제의 북방 경계선은 다시 임진강과 예성강 유역으로 환원되었음을 엿볼 수 있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