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머리말 : 시대적·사회적 배경
II. 성왕대 여창의 좌절
III. 위덕왕의 즉위문제
IV. 위덕왕의 대내체제 정비
V. 위덕왕대 국제적 위치의 재확립
VI. 맺음말 : 혜왕으로의 왕위이양
요약
위덕왕 재위 45년을 이해하는데 마지막으로 논란이 되는 부분은 위덕왕의 사후 왕위계승과 관련된 부분이다. 위덕왕이 대내적인 체제정비와 활발한 대외외교를 벌여 백제를 다시 일으켰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말년에 들어와서 정치적 혼란이 왕족 내부에서 일어났다는 것이다. 다름이 아니라 『일본서기』에는 위덕왕에게는 阿佐라고 하는 왕자가 있었는데, 이 아좌 왕자를 일본에 보낸 이듬해에 위덕왕의 동생인 혜왕이 왕위를 잇게 된 것으로 보아, 혜왕의 즉위과정에 어떠한 정치적 사건이 개재되어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가지게 된 것이다. 야심적인 장년의 법왕이 대고구려전을 지휘하였으며, 이 전쟁에서 백제가 승리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는 것이다. 그 결과 그는 전승에서 얻어진 권위를 배경으로 광범위한 귀족층의 지지를 확보할 수 있었으며, 나아가 정국운영까지 주도하며 집권기반을 마련하였다는 것이다. 위덕왕은 재위 14년(567) 이후 왕권신장을 지속적으로 추구할 수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정치적 상황 속에서 법왕이 대고구려전을 통하여 전면에 부각되면서 그의 집권기반을 마련하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귀족들이 아좌를 쫓아내고 혜왕을 즉위시킨다는 사실 역시 무리가 따른다고 하겠다. 그렇다면 위덕왕과 혜왕의 왕위계승은 위덕왕의 의사에 의하여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것이 아닐까 싶다. 기존 연구에서는 1년 정도에 그친 짧은 재위기간 때문에 혜왕의 정치적 비중이나 활동을 매우 소홀히 다루었다. 그러나 그가 대왜 군사파병교섭에 참여하였다든지, 위덕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는 사실은 위덕왕대 즉위 초부터 말기에 이르기까지 혜왕이 차지하고 있는 정치적 위치가 오히려 매우 높았던 것을 보여준다. 따라서 그는 위덕왕을 실질적으로 뒷받침한 인물로서, 위덕왕의 즉위 이후 위덕왕을 도와 당시 왕권을 지탱해준 가장 중요한 인물로 이해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요인들을 넘어서 위덕왕은 성왕계의 계속적인 결합을 위해서는 그의 아들보다는 지금까지 자신을 뒷받침해준, 그의 오랜 정치적 동반자이기도 한 혜왕의 왕위계승이 필요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에 위덕왕은 그의 아들과 또 다른 왕제를 왜로 보내고, 그의 사후 혜왕의 왕위계승이 이루어질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주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다시말해서 위덕왕의 혜왕으로의 왕위이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