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고대사의 여러 국가들 가운데에서도 백제는 천도가 매우 빈번하게 언급되는 국가이다. 때문에 천도는 백제사의 발전과정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단서가 되는 주제라고 할 수 있다. 이에 일찍이 정약용은 천도가 백제의 멸망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준 요인으로 설명하였으며, 백제사의 시대구분 역시 이와 같이 여러 차례 이루어진 천도에 따라서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그런데 백제사의 경우 여러 차례 언급되는 천도를 모두 같은 기준으로 이해할 수 있는가의 문제가 우선 제기된다. 왜냐하면 『삼국사기』온조왕 13년(B.C.6) 기사에서 백제가 마한에 사신을 보내어 하남 위례성으로의 遷都를 알릴 일에서나, 근초고왕 26년(371) 한산으로의 移都 및 웅진과 사비로의 移都에 보이듯 같은 표현이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천도나 이도의 용례나 성격에 대한 보다 자세한 검토가 필요할 것으로 생각된다. 온조왕대의 기록에 대해서 그것은 국방상의 이유로 인한 천도라기보다 정치적 갈등 속에 일어난 이주로 보아야 한다고 이해한다. 천도는 강역의 확립을 전제로 하여 핵심 지배세력의 치소를 옮기는 것이므로 소국 단위의 정치체가 병립하던 삼한 시기의 사정과는 거리가 있다는 것이다. 한편 논란이 있는 근초고왕대의 경우 그것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의견도 찾아볼 수 있다. 신라에서 여러 차례 왕성의 이동이 있었을 때 移居로 표현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하여, 이도는 비교적 가까운 거리의 거점 이동을 가리키는 용어로서의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성시대 같은 왕도 지역 내에서의 이동을 웅진이나, 사비천도처럼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모두 천도로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 경우에는 천도라기보다는 왕성 혹은 왕궁의 이동으로서 파악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지금까지의 천도에 대한 연구도 이들 지역에 대해서 문헌사는 정치사를 중심으로, 고고학은 도성사를 중심으로 크게 다루었다. 그러나 기본적인 여러 의문들이 여전히 남아있다는 사실에서 천도와 관련된 다양한 부분이 충분히 검토된 것은 아닌 것 같다. 사료의 제한도 물론 있겠지만, 도성사 연구에서 쉽게 살펴볼 수 있듯이 동태적인 이해보다는 정태적인 모습의 구조파악에 주력한 데에도 일정한 원인이 있을 것이다. 따라서 천도와 관련된 역사적 배경에 대한 관심이 보다 높아져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필자 머리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