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0년 7월 백제멸망 직후부터 일어난 부흥운동군의 활동은 200성을 수복하는 등 거의 모든 백제지역에서 매우 활발하였다. 실제로 나당군이 점령하고 있었던 곳은 사비도성과 웅진성 등 극히 일부의 거점성과 나당연합군의 백제공격로상에 있던 성들뿐이었다. 점령군인 나당군은 시종일관 부흥운동군의 공격을 감내하느라 사비성과 웅진성도 지켜내기가 어려울 만큼 군사적인 열세에 놓여 있었다. 당은 계속되는 고구려 원정과 서방과 북방의 이민족의 침입으로 말미암아 백제고지 지배에 대해 커다란 관심을 기울일 형편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부흥운동군의 활동으로 인한 유진당군의 처지가 매우 곤혹스러웠지만 별다른 대책을 수립하지 못하였다. 신라 역시 당의 고구려원정에 동원되어 부흥운동군을 진압할 여력이 없었다. 신라군은 평양 부근에서 고구려와 전투를 하고 있던 소정방의 당군에게 군량을 보내는데 문무왕이 직접 나설 정도로 국력을 기울였다. 부흥운동군이 백제고토를 거의 장악한 상태에서 웅진도독부의 유진당군은 고립된 채 신라의 원군과 군량의 보급만을 기다렸다. 백제를 멸망시킨 후 줄곧 부흥운동군의 공세에 밀리던 나당군이 공세로 돌아서게 된 것은 부흥운동군의 내분으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또한 662년 3월을 끝으로 당의 고구려 원정이 잠시 중단되자 신라로서는 더 이상 고구려원정에 동원되지 않게 되어 부흥운동군의 진압에 전력을 기울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당도 고구려 원정이 중단된 사이에 웅진도독부에 원병을 보낼 차비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결국 당은 고구려 정복이라는 더 큰 목표를 내세워 백제고지에서 일어난 부흥운동의 진압보다는 고구려 원정에 주력을 하였고, 변방 이민족의 침입을 막는데 우선적인 노력을 하였다. 그러므로 백제고지 지배는 현상을 유지하는 수준에서 더 나아가지 못했고, 신라에 의존해 웅진도독부의 당군을 보전할 수밖에 없었다. 신라 역시 당의 고구려 원정에 동원되고, 갑자기 서거한 태종무열왕의 뒤를 이은 문무왕이 내부적으로 왕권을 확립하는 것이 급선무였기 때문에 부흥운동 진압에 소극적이었다. 이러한 당과 신라의 내적인 문제는 부흥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될 수 있었던 주요한 요인이 되었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