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머리말
II. 온조집단의 남하와 백제의 건국
III. 구태의 즉위와 백제로의 성장
IV. 정복국가의 출현과 왕실의 교체
V. 맺음말
요약
백제를 건국한 시조는 온조 외에도 구이, 비류, 도모가 국내외의 사서에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이는 백제를 건국한 특정 개인에 대한 이칭이 아니라, 부여계의 시조로 알려진 도모(동명)를 제외하고는 성읍국가․연맹왕국․중앙집권적 귀족국가의 토대를 마련한 인물과 관련된다. 온조는 성읍국가 伯濟를 건국하였고, 구이는 연맹왕국 百濟를 형성한 고이왕이며, 비류는 중앙집권적 귀족국가를 완성한 근초고왕의 생부이었다. 그리고 도모는 백제의 건국과는 직접 관련이 없지만, 백제의 정복왕조와 관련이 있는 부여계 주민의 시조인 동명이었다. 온조집단은 고구려가 일찍이 정복한 동해안의 옥저지역과 원산을 거쳐 추가령지구대를 관통하는 고대 교통로를 이용하여 한반도 중부지역으로 진출하여 백제를 건국하였다. 온조 집단 외에도 한반도 중부지역에 정착한 고구려계 이주민은 다기한 사건의 여파로 인하여 수차례에 걸쳐서 남하하여 각지에 성읍국가를 건설하였다. 이들이 성읍국가를 벗어나 연맹왕국 단계에 도달한 것은 고이왕 때에 중국군현과의 충돌이 계기가 되었다. 고이왕은 온조의 직계자손이 아니라 優氏集團의 일원으로 이해되며, 백제는 연맹왕국 단계에 도달하면서 왕실이 교체되었다. 중국의 역사가들은 성읍국가 伯濟를 건국한 온조 대신에 연맹왕국 百濟를 건국한 고이왕(구이)을 백제의 실질적인 건국자로 이해하였다. 이들은 성읍국가 단계의 伯濟는 마한의 소국으로 파악하였고, 연맹왕국 단계에 도달한 고이왕 때에 백제가 건국된 것으로 인식하였다. 백제본기에 온조의 형으로 전해지는 비류는 온조와 동시대의 사람이 아니라 후대의 인물이었다. 비류는 3세기 후반 모용씨의 침입으로 인하여 부여국이 타격을 받아, 그 일부 집단이 동옥저를 거쳐 한반도의 중부지역으로 진출한 이른바 정복국가의 시조이었다. 일본 측 사료에는 도모를 백제의 시조로 전하고 있다. 근초고왕 때에 이르러 본격적인 대왜교섭이 시작된 후 왜국으로 많은 사람들이 건너갔는데, 당시에는 반고구려 정서가 팽배하였다. 따라서 백제계 이주민들이 고구려의 주몽을 그들의 시조로 인식하였을 가능성은 상대적으로 적고, 부여계 주민들의 조상으로 알려진 동명을 백제의 건국자로 인식하였다. 또한 백제가 성왕의 사비 천도 이후 국호를 ‘남부여’로 정하였고, 백제의 王姓이 부여씨였다는 점도 도모가 고구려의 주몽․추모가 아니라 부여의 동명이었음을 반증한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