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對北魏外交는 425최초로 이루어졌지만, 435년 對北燕問題를 둘러싼 양국이 책봉관계를 맺어나가면서 보다 활발해졌다. 430년대 北燕에 대한 北魏의 군사적 위협이 강해지자, 고구려는 平壤遷都이후의 정치․외교적 안정을 고려하여 국경을 접하고 있는 북위와의 외교에 관심을 두었다. 특히, 北燕과 친밀한 고구려는 북연에 관한 일련의 정보를 북위와 교환하고, 436년에는 북위의 북연공격에도 군사적으로 깊이 개입하였다. 그러나 北燕王 馮弘의 송환문제를 둘러싸고 양국의 외교는 23년간 단절되고 말았다. 그러나 고구려와 북위와의 외교는 462년에 재개되었다. 472년에 발생한 백제의 對北魏外交를 통해서도 고구려의 對北魏外交와 백제와의 관련성을 엿볼 수 있다. 백제의 對北魏外交는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한 군사동맹을 목표한 것으로, 그 당시 고구려는 북위와 백제와의 교섭을 고려하여 북위와의 관계수부에 노력하였다. 그리고 고구려는 간첩 道琳을 백제에 파견하여 내부적인 분열을 조장함으로써 백제를 공격할 기회를 줄곧 살피고 있었다. 480년 동성왕 즉위 후, 백제의 대고구려정책이 다시 전개되자, 고구려의 외교정책도 점차로 그 양상을 달리하였다. 예컨대, 고구려가 南齊와 외교를 맺은 것은, 남제와의 관계 속에서 백제를 견제할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구려는 백제의 외교 노선이 南齊-百濟-倭-加耶에 연결될 가능성을 의식하고, 백제를 견제하기 위한 일환으로 남제에 관심을 두었다고 여겨진다. 덧붙여서 484년에 고구려가 북위를 또다시 주목한 배경은, 이와 같은 정치․외교적 사정과 깊은 관련이 있는 듯하다. 고구려는 479년 이후, 약 5년만에 대북위외교를 재개하였지만, 고구려 단독으로는 백제와 신라에 대응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이와 관련해서 『南齊書』․『資治通鑑』에 기술되어있는 「魏虜의 百濟侵入」기사는, 고구려와 북위의 외교관계를 검토하는 데에 중요한 실마리가 된다. 魏虜의 실체에 관해서는 북위 혹은 고구려가 지적되어 왔지만, 두 차례에 걸친 魏虜의 百濟侵入은 고구려가 북위의 군사력을 빌려 백제본토를 공격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같이 고구려의 대백제정책은 제 1․2기보다 3기에 적극적으로 이루어졌으며, 나아가 고구려․북위 연합군의 패전이 5세기말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변화를 초래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