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I. 대방군의 설치와 운영
II. 3세기 중엽 이후 대방군의 변화
III. 대방군의 쇠망
1. 대방군의 쇠망시기 검토
2. 대방군의 쇠망과 백제의 북방진출
맺음말
요약
대방군은 3세기 초엽에 요동의 독립 세력인 公孫氏 政權이 낙랑군의 운영와 三韓 및 倭에 대한 관할에서 편의를 도모하고자 황해도 지역에 설치한 郡縣이었다. 대방군은 三韓諸國과 倭를 포괄하는 광범한 교섭루트를 담당하여 활발히 운영되고 있었다. 그러나 魏의 동방정책에 순응하던 馬韓諸國이 臣濆沽國의 首長을 필두로 하여 帶方郡의 崎離營을 공격하면서 대규모 戰鬪가 벌어졌다. 이 전투로 경기도 북부의 馬韓小國들은 큰 타격을 입은 반면에 전투의 피해가 적었던 백제가 마한의 새로운 盟主로서 급속히 성장하였다. 한편, 전 중국을 통일한 西晉은 3세기 후반에 東夷諸國과의 교섭라인을 東夷校尉의 직접 통괄체제로 변경함으로써 二郡은 역할이 크게 축소되었고 존재의 이유마저 없어졌다. 여기에 곧이어 발생한 西晉의 내부혼란으로 중국과의 연계마저 끊어지자, 二郡은 고구려와 三韓諸國의 틈바구니에서 존속을 도모해야 했다. 이때 대방군은 낙랑군과 외교노선을 달리하여 백제왕실과 혼인을 맺는 등 백제와의 친연관계를 바탕으로 존속을 도모하게 되었다. 낙랑군이 313년에 고구려의 공격으로 멸망한 후, 대방군도 314년에 고구려의 공격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따라서 이들은 세력이 크게 축소되어 종전의 중심지였던 載寧일대에서 서남쪽에 위치한 黃海道 信川지역으로 그 중심지를 옮겨 명맥을 유지하였다. 이들이 세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고구려가 遼東을 둘러싸고 慕容氏 세력과 치열한 대결을 벌이게 된 것은 가장 큰 이유였다. 이와 더불어 이들과 우호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백제가 대방군의 배후세력이 되었던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되었다. 그러나 고구려는 355년에 요동 진출이 좌절되자 관심을 南進에 두게 되었고, 이에 위기를 느낀 대방군은 355년에서 369년 사이에 백제로 투항하면서 비로소 쇠망에 이르게 되었다. 이 시기 백제의 북방 진출은 武力經略의 결과가 아니라 대방군이 백제로 투항해 온 결과였다. 이로 인해 근초고왕대의 백제는 옛 대방지역으로 진출하여 고구려와 장기간에 걸친 대규모의 전투를 벌였으며 평양성을 공격하여 故國原王을 전사시키는 전과를 거두었다. 뿐만 아니라 이후 帶方郡의 遺民들은 백제의 국가체제에 편입되어 외교와 학술 분야에서 활약하며 백제의 국가발전에 공헌하였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