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백제부흥운동의 범주와 역사적 의미
II. 부흥운동기 백제사 연구의 과거와 현재
III. 부흥운동기 백제사 연구의 과제와 해결방안
IV. 제언
요약
백제 부흥운동의 중요한 한 부분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웅진도독부시기 백제의 활동내용을 당나라의 괴뢰정권으로만 치부하고 넘어가는 모습을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다. 특히 중국학계는 이것이 일반화되어 오늘날 중국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이 시기의 동아시아지도 중에는 백제나 고구려의 영역이 중국의 영토로 표시되어 있는 경우도 어렵지 않게 찾아진다. 그러나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당나라의 기미정책과 이를 이용해 백제의 중흥을 꿈꾸며 부단한 노력을 기울인 부여융의 활동내용을 간과해서는 안 되리라고 생각한다. 백제부흥운동사는 물론이고 백제사 전체를 놓고 보아도 웅진도독부체제 하의 백제는 나름대로 중요한 의미를 지닐 수 있다. 이 당시 백제와 신라와 당나라의 관계를 보면, 당 고종은 신라사신 김흠순을 통해 신라가 차지한 백제의 옛 땅을 다시 모두 돌려주라는 조칙을 내려 부여융과 문무왕 사이에 체결되었던 취리산 맹약문의 내용을 백제화시키려 할 정도로 親百濟的인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상황이 의자왕 통치 시기와는 정반대로 역전되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부여융이 당의 적극적인 지원을 얻어내며 백제의 부흥운동을 효과적으로 이끌어 나가려 한 노력이 성공으로 거두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풀이할 수도 있는 부분이다. 다만, 이 무렵에 와서는 중국을 중심으로 한 국제관계가 토번으로 인해 당에게 불리하게 변함으로써 당은 한반도에 파견된 군대까지 토번과의 싸움에 동원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에 놓이게 되었고,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唐 朝廷 여론의 대세도 한반도에서의 군사활동을 반대하는 쪽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결국 부여융의 노력이 수포로 끝난 것이나 신라의 삼국통일이 가능했던 것 역시 한반도 내부문제 만이 아니라 이러한 국제관계의 변화와 상당부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동안 우리가 무신경으로 일관해 왔거나 잘못된 역사지식 때문에 잃어버렸던 부여융을 중심으로 한 웅진도독부시기 백제의 역사를 다시 찾아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