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一. 紀元以前 한강유역의 정치적 상황
二. 한강유역 初期鐵器文化와 流移民集團
三. 伯濟國의 발전
맺음말
요약
기원이전 한강유역 무문토기는 전기에 동북한,서북한 지역 등 다양한 계통의 문화가 유입되어 상호융합되는 양상을 띠고 이는 후기에도 계속되었으나 세형동검문화 발달은 빈약한 편이며 같은 시기 낙동강유역이나 충남지역과 큰 차이점이다. 특히 위만조선계통의 세형동검-철기-토광묘를 특징으로 하는 세형동검종말기의 유적이 거의 없으며 이는 온조집단등의 유이민세력이 정착하는데 유리한 여건을 조성하였다.
백제건국의 중추세력인 부여-고구려계 유이민이 한강유역에 정착한 시기는 삼국사기 온조의 개국연대와 비슷하며 종전의 무문토기인들을 개별적으로 흡수, 통합하며 초기백제의 역사는 시작된다. 그결과 한강유역에는 종래의 선주민과 신라의 유이민이 결합된 제소국이 형성되고 그 중에서도 전형적인 고구려묘제인 무기단식 적석총을 축조하며 인근 지역에 비해 훨씬 우월한 세력으로 성장한 집단들이 대두하게 되는데 이들이 초기백제사에 큰 역할을 담당하는 북부, 동부 세력이라고 생각된다. 한편 소국단위의 각 지역집단에서는 신종의 김해식토기-철기-적석총 문화요소와 무문토기-석기-지석묘의 요소가 잠시 공존하는 양상을 띠며 유이민집단들은 철제품의 독점을 통해 선주민세력에 대해 우월한 정치력을 행사할 수 있었고 그 결과 각 소국내에서 지배집단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는 2세기까지 계속되었는데 3세기가 되면서 하남위례성의 伯濟國을 구심점으로 분산적이던 제소국들이 연맹관계를 강화해 나가게 되며 그 결과 북부와 동부의 지배집단들이 중앙으로 흡수되어 내적 체제정비를 기반으로 낙랑, 대방등에 적극적 대응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비류집단은 삼국사기에 서부로 추정되며 중앙으로 흡수된 시기도 타집단에 비해 늦은편이고 그 문화적 기반은 인천을 포함한 충남해안지역의 토광묘문화로 파악된다. 3세기 중반에는 각 세력에 대한 통합이 완료되고 伯濟國은 백제를 칭하며 대외적 팽창기에 접어들었다. 이후 백제사의 전개는 백제중앙과 마한잔여세력으로 구성된 지방세력으로 설정하여 이해할 수 있고 4세기중반의 마한정복은 영산강유역에 5세기 성행한 대형 옹관묘 존재를 보건데 단순히 마한잔여세력을 백제세력권에 편입시켰을 뿐 기존사회를 깨지는 못했던 것 같다. 횡혈식석실분이 등장하는 6세기초에 완전히 백제화되는데 이는 건국초부터 진행된 흡수, 통합과정이 완전히 일단락되어짐을 의미한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