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머리말
II. 백제국의 성장
III. 충청지역으로의 진출
IV. 진출한 시기
V. 맺음말
요약
북방의 부여-고구려 방면에서 남하한 사람들이 한강유역에 정착한 것은 대략 서기 2세기경이었다. 그들은 한군현과 토착세력의 견제 속에서도 점차 세력을 키워 3세기경에는 드디어 성읍국가 이상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한강유역에서 국가형성이 늦어진 것은 낙랑군을 비롯한 한군현의 정치․군사적 영향 때문이었다. 한군현은 주변지역의 정치세력화를 막기 위해 각종 수단을 통해 회유하거나 以夷制夷의 방법으로 견제하는가 하면 종종 직접 타격하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백제 왕실은 3세기에 안정적인 권력을 확보하기 위해 한군현과 격렬히 다투어야 했다. 4세기초에 낙랑군이 멸망하고 대방군 또한 무력해지자 많은 유민들이 백제로 흡수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郡縣故地의 영유권을 차지하기 위해 고구려와 쟁패하였다. 그리하여 4세기 중․후엽에는 잠시 북쪽으로 대동강유역까지 진출하는 개가를 올렸으나, 4세기 말엽에는 패전을 거듭하면서 수도인 한성까지 위협받기에 이르렀다. 백제가 대동강유역까지 북진한 것은 근초고왕때였다. 그는 東晋 樂浪太守호를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로 인해 백제가 남쪽으로 강역을 확장할 기회는 많지 않았다. 백제가 馬韓의 일원이었던 탓에 큰 충돌을 피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한군현․고구려와 같은 강적을 상대해야 했기 때문인 듯하다. 백제가 북쪽으로 대동강유역까지 진격하였을 무렵 남쪽으로 금강유역에까지 진출하였다. 『三國史記』「百濟本紀」溫祚王 13년조에서 백제 영토를 ‘북쪽으로는 浿河, 동쪽으로는 走壤, 남쪽으로는 熊川까지’ 획정했다고 한 것은 실제 근초고왕 무렵의 강역을 지칭한 것이다. 그러므로 백제가 충청지역을 장악하고 영역으로 흡수한 것은 4세기 중․후반의 일로 생각 된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