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시대의 백제 문자 자료는 칠지도가 있다. 칠지도의 제작에 대해서는 여러 이설이 있지만 본고에서는 369년에 제작된 것으로 보았다. 이 시기의 일차자료로서 현재 남아 있는 것으로는 칠지도 이외에는 大夫, 井 등의 한자가 새겨져 있는 풍납토성 출토의 명문토기와 명문전이 확인되고 있다.
웅진시대의 백제 문자 자료로는 무령왕릉 출토품이 대표적이다. 여기에는 한문이 아니라 초기 이두 문자적인 표현이 확인된다. 왕비의 은제 팔찌에도 명문이 새겨져 있다. 왕의 지석에도 표면에 5cm 정도로 경계선을 파고 그 안에 6행의 한문을 음각하였다. 또한 중국 양나라의 양직공도에 백제 사신의 그림이 남아 있어 이 시대의 자료로 보는 것이 가능하다. 그리고 문자명 전은 풍납토성과 공주 송산리의 무령왕릉, 부여 정동리의 요지터에서 발견되고 있다. 특히 공주 송산리에서 발굴된 “양관와위사의” 명문전은 중국 남조인 양과의 밀접한 관계를 보여주는 자료이다. 대통사는 ?삼국유사?에 의하면 대통원년(527)에 양제를 위해 건립되어 대통사로 명명되었다고 한다. 이 역시 남조의 양나라와의 교류가 활발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사비시대의 백제 문자자료로는 백제창왕명사리감이 있다. 전면의 감실 양측에 10자씩 문자가 음각되어 있다. 또한 1948년에 발견된 사택지적비가 있다. 백제의 목간은 궁남지, 관북리, 쌍북리, 능산리사지 등에서 발견되었고, 인명 기와는 사비시대에 집중되어 출토된다.
한자는 백제 건국 이전에 이미 전래되어 있었다. 실제의 자료를 통해서 당시 백제의 문자사용 실태를 아는 것이 가능하며 한문의 해독에 뛰어난 인재가 존재한 것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행정 문서 작성에 능한 관리들도 존재하는 것으로 볼 때 문자의 보급이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던 것을 알 수 있다. (연구원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