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고는 ≪宋書≫ 倭國傳에 나오는 古代韓日關係史와 관련된 기사들을 새로운 시각에서 검토하여 왜가 한반도 남부지역을 지배하였다고 하는 이른바 '任那經營說'이 성립될 수 없음을 밝히고자 하였다. 韓半島諸國이 포함된 왜왕의 自稱號는 대외적으로는 백제가 중심이 된 신라·가야·왜 연합이라고 하는 對高句麗 外交網에 참여한 왜가 연합세력의 主軸을 놓고 백제와 경쟁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칭한 것이며, 대내적으로 일본열도의 통합을 추진하면서 韓半島諸國과의 교역권을 장악하자 이를 諸豪族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방편으로 칭하면서 송으로부터 인정받아 信賴性을 附加하려고 한 것에서 나온 것이다. 大和王權의 日本列島 統合은 倭王 武의 祖禰=祖父인 珍과 濟의 東征·西服·渡平海北으로 이루어졌으며 그 시기는 대략 430년에서 460년대이다. 이는 5세기 전반까지 일본열도는 아직 하나로 통합되지 않은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왜가 4세기 후반 경에 한반도 남부지역을 군사적으로 지배하였다는 설이 성립될 수 없다. 종래의 연구에서는 渡平海北의 海北을 한반도로 보아왔다. 그러나 ≪三國地≫ 東夷傳에 낙랑·대방군의 使臣이 邪馬臺國까지 가는 行路가 南으로 되어 있고 또 ≪日本書紀≫ 神代 上에 나오는 海北은 구주를 가리키고 있다. 따라서 海北의 '海'는 瀨戶內海'이며 '海北'은 '九州地域'임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渡平海北을 근거로 왜가 한반도로 진출하여 군사적으로 정복하였다고 주장할 수 없는 것이다. 고구려가 抄略한 邊隷의 實體에 대해 종래에는 백제로 보아왔다. 그러나 이 '邊隷'는 倭가 宋에 대해 自國을 낮추어 부른 말로서 고구려에 의해 抄略된 邊隷는 송으로 가는 왜의 使臣團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邊隷를 百濟로 보아 왜가 고구려에 대항하면서 한반도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다는 주장은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5세기에 백제와 왜는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지 결코 支配-被支配의 관계는 아니었다. 한편 왜는 신라를 빈번히 侵掠한 것으로 나오지만 모두 격퇴되었다. 또 신라는 왜의 근거지인 對馬島와 倭의 本土를 공격하려는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다. 이는 왜가 한반도를 군사적으로 지배한 적이 한번도 없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