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고는 삼국유사 무왕조 기사를 분석, 종합하여 사비 시대 후기의 지배체제 일면을 살펴보았다. 그 과정에서 무왕조에 보이는 서동은 왕족 가문 출신이나 정치적 사건으로 말미암아 익산에서 신분을 감추고 마를 캐며 빈모와 빈한한 삶을 영위하는 과정에서 서동이란 이름을 얻은 것으로 보인다. 서동이 왕이된 것은 백제가 관산성 패전 이후 귀족 중심 정치 운영 체제가 성립되고 혜왕, 법왕이 대항하다 단명으로 끝난 후 당시 실권을 장악한 유력 귀족들이 서동을 맞이하여 그들 중심 지배체제를 강고히 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서동과 선화 공주의 결혼은 왕이 된 이후 이루어진 것으로 무왕 8년 전후로 고구려의 백제, 신라 압박에 공동 대응이라는 정치적 목적 하에 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서동설화는 이 결혼을 보다 극적으로 묘사하기 위해 서동 시절 부른 것으로 윤색된 것이다.
무왕은 즉위 후, 왕권 강화를 위해 익산 경영을 추진하였고 이에 짝하여 거대한 미륵사를 건립하였다. 미륵사는 미륵불국토 실현이라는 것 외에도 전륜성왕 사상으로 무왕의 권위와 위엄을 불교 신앙적으로 뒷받침해주는 것이었다.
다만 무왕의 정치적 한계는 익산으로의 천도계획이 귀족 세력과의 대립에 좌절되어 여전히 귀족 중심의 정치 운영체가 기능을 발휘한 것이다. 무왕 말기 궁남에 못을 파고 물 속에 방장선산을 만들어 즐기는 것이 이러한 한계성을 인식한데서 나온 결과로 보인다.
소기의 목적은 달성하지 못하였으나 이를 통해 다져진 정치적 기반은 의자왕 초의 정치운영의 바탕이 되었다. (연구원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