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서론-한반도계 문화의 고고학적 인식
Ⅱ. 6세기 경 한반도계 문화의 고고학적 양상
1. 취락유적이 보이는 한반도계 문화
2. 墓制에 보이는 한반도계 문화
요약
일본열도에서는 죠오몽(縄文)시대, 야요이(弥生)시대를 거치면서 주거내의 취사와 난방을 위한 시설은 爐址가 그 주류를 이루었다. 이러한 爐址위주의 주거내 취사와 난방시스템이 고분시대에는 주로 부뚜막과 시루를 이용한 한반도계의 시스템으로 전환되는 양상이 나타난다. 北部九州 일부 지역에서는 야요이시대 말 혹은 고분시대 초경에도 나타난 예가 있는 것으로 보고되지만 대체로 일본열도 전역에 보급되기 시작한 것은 5세기경이다. 그리고 일본의 東北地方에까지 광역적으로 확산되어 보편적 취사 및 난방시설로 정착되는 시기는 6세기경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일본열도의 취사 및 난방시스템의 급격한 변화는 한반도계의 취사·난방 시스템의 도입과 확산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한반도에서 일본열도로 건너간 한반도계 사람들의 역할을 중시하지 않을 수 없다.
6세기경 취락유적에 보이는 또 다른 한반도계 주거문화로 주목되는 것은 大壁建物址의 존재이다. 이러한 주거양식은 일본열도내 야요이시대의 전통에서는 찾기 어렵고 비록 출토 예는 적지만 한반도의 백제유적에서 찾을 수 있다. 현시점에서 백제계 주거양식으로 단정할 수는 없지만 한반도계의 새로운 주거양식의 도입으로 평가하여야 할 것이다. 또한 大壁建物址가 발견되는 주거지역에는 滋賀縣 穴太遺蹟처럼 온돌과 부뚜막시설 등의 한반도계 취사·난방문화가 도입되기도 하고, 大阪 大縣遺蹟처럼 대규모 철기생산유적이 영위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출토양상은 이들 지역에서 한반도계 사람들의 집단거주 혹은 철기생산과정의 관여를 추정할 수 있다. 즉 대벽건물이라는 한반도계의 주거문화를 가진 사람들이 각 지역에서 集住하며 철기와 같은 첨단의 필수물자 생산에 관여하는 등 여러 방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竪穴系 매장시설이 주류를 이루던 일본열도에 6세기경이 되면 墓制의 변혁이 일어난다. 畿內에 도입된 백제계 횡혈식석실이 일본열도의 주요한 首長墳 뿐만 아니라 6세기경에 새롭게 영위되는 群集墳에도 매장시설로 보편화된다. 이러한 墓制변화는 死後世界에 대한 사상의 변화와 이에 따른 葬送儀禮의 급격한 변혁을 의미한다. 사후세계에 대한 관념의 변화는 한반도계 이주집단에 의해 새롭게 도입되어 나타난 현상으로 볼 수 있다. 즉 보수성이 강한 묘제의 급격한 변화를 초래할 만큼 한반도계 사람들의 문화와 그 역할은 매우 역동적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횡혈식석실을 매장시설로 하는 6세기경 군집분의 경우 지역적 편향성으로 보아 6세기 야마토정권내 有力氏族의 세력확대와 관련된 정치활동과 관련하여 설명할 수도 있다. 이중 일부 군집분에서 한반도계 취사문화와 관련된 부뚜막과 시루의 모형 등을 다량으로 부장하는 양상이 반영하는 것처럼 한반도계 신흥씨족들도 군집분 조영에 관여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즉 6세기경에 나타난 일본열도내 묘제상 대변혁의 핵심적인 배경에는 한반도계 사람들에 의해 도입된 문화와 그들의 역할이 필연적으로 존재하였을 것이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