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서언
II. 조공 및 책봉관계의 이론과 실제
III. 의자왕 시대 백제의 자주외교와 신라의 사대외교
IV. 웅진도독부시기 백제의 사대외교와 신라의 자주외교
V. 백제의 멸망과 신라의 삼국통일에 대한 재조명
VI. 결어
요약
백제는 의자왕 정권의 붕괴와 함께 끝났다고 할 수 있으며, 일반적으로 백제 멸망의 시기는 660년 7월 18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사실 의자왕이 항복한 이 날은 백제가 외부세력에 의해 강제로 정권을 교체 당하여 몰락의 길로 들어설 수밖에 없었던 불행한 날이기는 하다. 그러나 영토국가로서의 백제의 모습이 역사상에서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웅진도독부체제 하의 백제를 공격한 신라가 사비성에 소부리주를 설치하고 도독을 임명하여 백제지역에 대한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한 시기부터라고 할 수도 있는 만큼 백제의 멸망을 671년 7월로 보는 시각 또한 성립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이같은 논리를 따른다면 백제의 멸망이나 신라의 삼국통일은 자주외교 노선을 선택한 신라가 백제를 지원하는 당나라와 전투를 벌이던 중 중국을 둘러싼 국제정세의 변화로 당나라 군대가 한반도에서 철수함에 따라 어부지리처럼 얻게 된 열매라는 것도 부정할 수 없으리라 본다. 우리나라의 역사가 새로운 단계로 발전해 나갈 수 있는 전기를 만들어주었다는 점에서 신라의 삼국통일이 지니는 의미는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로 인해 우리 역사에 어쩔 수 없이 많은 아쉬움이 남게 된 것도 사실이다. 예를 들어, 고구려 땅이었던 광활한 만주 벌판이 우리 역사에서 사라지고, 고구려사가 “동북공정”으로 문제되고 있는 것도 신라의 삼국통일이 우리에게 남겨준 불행한 역사유산이라 할 수 있겠다. 백제사의 경우도 아쉬움이 남기는 마찬가지이다. 백제는 시조인 1대 온조왕부터 31대 의자왕까지 678년을 이어오는 동안 부드러움, 단아함, 소박함, 따뜻함, 유려함 등으로 표현되는 수준 높은 문화를 만들어냈고, 또 일본 고대문화의 형성과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주변국가에 그 선진문화를 전파시켜주는 역할도 담당하였다. 정작 우리 땅의 백제유산은 대부분 폐허 속의 잔재로만 남아있어 보는 이에게 안타까움을 준다. 백제의 문화유산이 오래 동안 관심 밖에 있으면서 그 우수성을 주목받지 못했던 것 역시 신라의 삼국통일이 남긴 불행의 산물이 아닐까 생각한다.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