漢城의 함락이라는 일대 위기에 봉착한 백제는 熊津에서 국가를 재건하고 未曾有의 바상 時局을 수습해 가지 않으면 안되었다. 무령왕(501~523)은 한성시대의 마지막 왕인 개로왕의 동생 昆支의 장남으로 태어나 異腹동생인 동성왕이 시해된 뒤 40세의 나이로 즉위했다. 무령왕의 生父가 개로왕이라는 설은 뒤에 무령왕이 聖王으로 이어지는 사비시대 왕실의 中興祖가 된 상황에서 극도의 난맥상을 보인 웅진시대의 왕통이 무령왕의 등극으로 말미암아 終止符를 찍게 되었다는 취지에서 府會한 것으로 보인다.
무령왕은 이복동생과는 대조적으로 인자하고 寬厚한 성품으로 민심을 얻을 수 있었고, 특히 민생문제의 急所에 메스를 가했다. 즉 민생의 안정을 위해 遊食하는 浮浪人을 거두어 公民權을 부여한다거나 水利시설을 수축하여 농업생산의 기반을 강화하는 등 적극적으로 대처했다. 왕은 이렇게 하여 길러진 국력을 갖고 失地 회복전쟁에 나서서 큰 성과를 거두었다. 이것은 6세기에 들어와 고구려의 국력이 상대적으로 약화된 好機에 힘입은 바도 적지 않았으나 역시 왕의 非凡한 정치 역량이 비상시국을 극복하고 나아가 안정을 이룩한 원동력이었다고 생각된다.
왕은 내치와 군사뿐 아니라 대외 교섭에 있어서도 큰 성과를 거두었다. 왕은 고구려의 남침 위협에 공동으로 대처하기 위해 신라와 굳게 結束했으며, 왜국에 대해서도 五經박사를 정기적으로 파견하여 儒學을 지도하는 등 한층 우호관계를 다졌다. 특히 왕은 중국 남조의 梁나라와 통교하여 백제의 국제적 位相을 높이는 데 성공했다. 실제로 이 梁과의 교섭은 중국의 先進文物을 받아들여 국가의 面目을 一新한다는 문화적인 면에 큰 의의가 있었다. 이처럼 백제는 무령왕 때 국력을 착실히 회복하여 왕이 죽을 무렵이면 다시금 한성 함락 이전의 强國으로 회복되었다. 흔히 말해지는 聖王 때의 국가적 中興은 그 生父인 무령왕 때 이미 기초가 닦여졌다고 할 수가 있다. (필자 맺는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