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초기 왕계기록상에 나타날 수 있는 몇 가지 문제를 중심으로 그 신빙성 여부를 검토해 본 결과 부분적으로 잘못된 기사가 있다 하더라도 백제와 같은 계통으로 알려진 扶餘나 高句麗 初期史를 감안할 때 초기 왕위세계 기록만큼은 신빙성있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백제의 왕위계승은 원칙적으로 父系直子繼承이 이루어졌고 그 계위후보자를 太子라 하였으나, 太子가 어려서 정사를 돌볼 수 없는 경우에는 일정 가계 범위 안에 있는 왕족 가운데 우수한 신체조건과 武才 등을 겸비한 인물이 “國人”의 추대를 받아 계위하였다.
古爾王의 즉위과정을 검토한 결과 古爾王은 대내적으로 太子 沙伴이 어려서 정사를 돌볼 수 없는데다가 대외적으로 한군현과 말갈 및 신라와의 전쟁에 대처해야 하는 난국을 맞아 沙伴王과 6촌간인 古爾가 비상조처의 일환으로 즉위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는 당시 왕으로서 일반적으로 요구되던 탁월한 騎馬善射力을 갖고 있어서 비상시에 계위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즉위과정에는 모계세력에 연결된 眞氏勢力의 군사적 기반이 크게 작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 眞氏勢力이 古爾王 즉위 후에 右輔와 左將과 같은 병마권을 한 동안 장악했던 사실이 이를 반증해 준다고 하겠다.
比流王의 즉위문제도 太子인 契가 어려서 정사를 돌볼 수 없는 상태에다 比流 자신이 탁월한 善射力을 갖고 있어 肖古王系로서 계위하였던 것이다. 한 동안 古爾王系가 배타적으로 왕위를 독점하였으나, 責稽王과 汾西王이 잇달아 피살됨으로써 比流가 계위하게 되어 古爾王系와 肖古王系 간의 왕위계승을 둘러싼 갈등을 심화시키게 되었다.
백제초기의 국왕은 東明廟 배알과 祭天祀地와 같은 여러 祭儀를 주재하는 司祭王의 성격을 지녔고, 이를 통해 扶餘族 공동시조로 숭앙되었던 東明의 후예로서 초월적인 권능을 확인하였을 뿐만 아니라 百濟의 주체세력인 扶餘族 이주민 집단간의 결속과 전통을 유지하고자 했다. 그러나 사회가 점차 발전하고 또 주변세력과의 무력충돌이 빈번해 집에 따라 군사 지휘자로서 기능을 수행하게 되었고, 그 밖에 권농과 진휼 및 영토확인의 의미를 가진 순무를 빈번히 행함으로써 민심수람과 완만한 지방 통치력을 보완하려는 기능도 수행하였던 것이다.
(필자 맺음말 첨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