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고는 일본학자들의 칠지도 명문해석과 논증들을 파악 분석하여 그 그릇된 사료조작을 비판하고 명문내용을 고증적으로 규명하고 연구해 보려는 첫 시도이다.
일본학자들의 해석방법과 사료조작의 의도를 분석하는데 도움이 되기 위하여 중요한 논증들을 열거하여 보면, 연호에 대한 해석으로는 간사이도모(菅政友), 다가하시겐지(高橋健自), 호시노히사시(星野恒), 기다데이기지(喜田貞吉), 오바이와오(大場磐雄), 스에나가마사오(末永雅雄), 후구야마도시오(福山敏男), 가야모도모리도(榧本杜人), 미시나쇼에이(三品彰英)의 견해가 있다. 월일의 해독으로는 후구야마도시오(福山敏男), 가야모도모리노(榧本杜人)의 견해와 每日新門의 국보 제1호 도판 해설이 있다.
칠지도는 오랜 세월동안 자연적인 마멸로 인해 문자의 해독이 불가능한 것이 몇 군데 있고 명문 가운데 연호와 월일의 數字劃에는 후세의 인위적인 날삭이 가해져 있어서 해독이 곤란하게 되어 있다. 이와 관련하여 광개토왕비문연구로 알려져 있는 李進熙는 날삭의 장본인을 石上神宮의 大宮司를 역임한 간사이도모(菅政友)라고 하였다. 또한 간사이도모(菅政友)가 쓴 石上神宮所藏六叉刀銘이란 논문과 高句麗好太王碑考를 통해 그의 偪見과 韓史에 대하여 불신관을 가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칠지도의 명문을 다시 분석해보면, 연호와 관련해서는 泰和는 백제의 연호이다. 이병도박사의 논증대로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기 이전까지는 중국의 연호를 사용한 일이 없고 대개 자국의 연호를 사용하였다. 비록 사서에는 기록이 없지만 고구려는 광개토왕의 연호가 永樂이었고, 신라에서는 瑞鳳冢에서 출토된 銀盒에 ‘然壽元年太歲’란 연호가 있어 다같이 자국연호를 사용한 예가 있는데 백제만이 자국연호를 사용하지 않았다고 할 수 없다. 근초고왕 24년(369)은 백제가 마한을 통합한 의의깊은 해로서 이해에 泰和年號를 정했을 것이라고 이병도박사는 논증하였다. 칠지도의 명문 가운데 ‘宜□供侯王’에서는 □를 供으로 보는 京都大學의 上田正昭의 견해에 따라 칠지도를 百濟大王이 侯王인 倭王에게 하사한 刀劍이라 보았다. (센터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