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國時代末의 백제멸망에 관련된 羅唐聯合軍과의 前後三回에 걸친 싸움의 大綱을 살펴보고, 거기 나오는 지명의 위치비정을 시도하였다. 여기 문제로 제기된 지명은 伎伐浦·豆良尹城·古沙比城·白江·周留城·州柔城·避城 등이다.
이 중 周留城·豆良尹城·州柔城 등은 동일 지명의 唐書·三國史記·日本書紀 등 삼국의 기록에 따른 別寫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周留城은 그 沿岸地方인 白江口에 伎伐浦海岸이 있고, 이 일대에 古沙比城·避城 등이 서로 이웃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의문으로 남겨진 지명비정을 위해서는 類音地名의 비정에 그치지 않고, 지정학적 고고학적 측면에서 이를 추구해 나갔다. 그 결과 이 일대는 현 전북 부안지방을 중심으로 한 전북 서해안 일대임을 알 수 있다. 伎伐浦는 백제의 皆火縣 後의 扶寧地方이고, 古沙比城은 古沙夫里, 현 고부지방이고, 白村-곧 白江은 백제 欣良買縣, 현 부안군 백산면 일대이고, 避城은 백제 벽골제, 현 김제지방이다. 이리하여 周留城(豆良尹城)의 위치는 현 줄포만을 거느린 부안군 상서면에 있는 위금암산성과 그 주변에 비정된다.
避城·伎伐(浦)·古沙比·周留 등은 이미 위지마한조의 辟卑離國·支半國·狗素國·捷盧國에 대비된다. 마한 54개국명 중에서 「不彌國·支半國·狗素國·捷盧國·牟盧卑離國」이라 열거된 것을 종래에 일본인학자에 의해서 「不彌支·半狗·素捷盧」로 變改된 것은 큰 오류였다. 牟盧卑離는 백제 毛良夫里이며, 白江은 晉書의 「新彌國」에 비정된다. 이 일대가 우연히도 삼국시대말 백제의 對羅·唐軍戰鬪의 역사적 무대와 일치하고 있는 것은 크게 주목된다. 이는 이 전북서해안 일대가 선사시대로부터 해상을 통한 문화기착지점이며, 要路였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본고는 사실상 소정방의 伎伐浦上陸作戰·新羅軍의 豆良尹城進攻作戰·周留城總攻作戰의 세 部門으로 나누어 論及하면서, 伎伐浦·古沙比城·白江에 대한 고찰을 진행시켰고, 周留城은 따로 고찰하였다. 伎伐浦와 白江은 동일해안지역으로서 함께 묶어서 고찰하는 것이 당연하겠으나, 각 전투별로 論及해 나갔기 때문에 분리시켜 고찰하였다.
周留城의 위치판단에 있어서 결정적인 고증자료로서는 日本書紀에 나오는 州柔城陷落 후 百濟殘在勢力의 일본에의 망명로에 관한 기술을 들 수 있다. 여기서는 牟弖·弖禮城의 두 지명을 百濟末冬夫里·冬老에 비정하였는 바 전남 함평과 鳥城(兆陽)間의 道里日程과 南平~州柔城間의 그것을 비교한 바, 州柔城은 현 전북 고부~부안 사산리線 이북으로 북상될 수 없음을 논증하였다. (필자 결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