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시 일부에 분포한 산성은 『갑천수계』와 『계족산·식장산계』의 2군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계족산·식장산계』의 산성은 대전시 동부 산악일대에 일선으로 구획되는 방어선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라 하겠다. 즉 군사적인 목적으로 축조된 이 산성들은 모두가 깊은 계곡을 낀 높은 산정에 일례로 布置되어, 삼국시대 신라의 전초기지인 古尸山城(현 옥천)과 대치되고 있는 것이다.
『갑천수계』의 산성은 대전직할시를 관통하여 흐르고 있는 갑천에 임하고 있으며, 그 지역의 중심지인 평야지대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라 하겠다. 특히 연축동산성과 구성동산성은 낮은 구릉에 위치한 토축 또는 토, 석 혼축의 산성이며, 다 같이 井址가 성밖에 시설되어 있는 점 등으로 보아 전투용산성보다는 保民用의 치소일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하여 구 회덕읍에 인접하여 위치하고 있는 연축동산성은 우술군의 치소로, 유성 관내에 위치하고 있는 구성동산성은 노(내)사지현의 치소로 비정할 수 있다고 하겠다.
산성의 형식에 있어서는 대전시 관내의 산성은 모두 테뫼식 산성의 범주에 넣을 수 있겠으며, 축조방법에 있어서는 계족산성과 질현성 및 갈현성의 일부 구간이 내외 협축되어 있음이 확인되나, 그 외의 모든 석축산성은 내탁에 의한 편축방법을 채용하고 있다. 이러한 축성방법은 인력이 적게 들고 시간이 절약된다는 이점이 있으며, 백제산성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방법이다.
산성의 구조에 있어서 계족산성의 축조방식이 보은 삼년산성의 축조방식과 맥락을 같이 하고 있어 주목된다. 이러한 양상은 성벽축조에 사용된 성석이 편암계의 납작납작한 석재이기 때문에 면석과 적심석이 서로 물리도록 모로 쌓기가 곤란하다. 왜냐하면 성벽의 하중을 이기지 못하여 석재가 부러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벽의 하중을 골고루 받게 하기 위하여 井자식으로 축조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대전관내에서 편암계의 석재로 축조한 산성은 성치산성, 이현동산성, 장동산성 등이 있다.
성내시설로서는 능성과 삼정동산성에서는 치성이 그리고 계족산성에서는 곡성이 시설되어 있으며, 문지는 능성 및 갈현성과 안산동산성에서 비교적 잘 남아 있는데 문지의 양벽은 능성, 갈현성, 안산동산성에서 모두 장방형으로 성벽보다 두텁게 육축되어 있으며, 삼정동산성은 남, 북문지 부근에 치성을 시설하고 있는데, 옹성의 형태로 까지는 발전하지 못하였다.
《삼국사기》와 《구당서》 등 중국사서에는 우술성[구 회덕], 내사지성[구 유성], 내사지현[구 유성], 진현성[구 진잠]이 백제부흥운동과 관련하여 주요거점으로 수록되어 있다. 이들 성지의 명칭은 《삼국사기》〈지리지〉에 의하면 바로 군현명과 일치되고 있으며, 더 나아가 각 시대의 지리지를 통하여 지명의 변천과정을 살펴보면, 상기 지명들은 모두 현 대전직할시에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중 우술성은 옹산성 전투기사와 관련되어 나타나며, 진현성은 지라성, 윤성, 사정, 대산 등 성책과 함께 나타나고 있는데, 이들 성책의 주요 임무는 사비[부여], 웅진[공주]에 주둔하고 있었던 유인원 등의 당군과 신라와의 연결선, 즉 상기 사서에 『新羅讓道』, 또는 『新羅運糧之路』로도 기록되어 있는 『熊津道』를 차단하여 당군을 고립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비록 이들 제 성책의 함락으로 이 『熊津道』의 차단에 실패하여 결국은 백제부흥운동의 와해를 앞당기는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지만, 당시 이 지역이 백제와 신라와의 중요한 통로로 이용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이다. 또한 신라에게 한강 하류지역을 빼앗긴 성왕이, 이에 대한 보복으로 관산성[옥천]을 공격하다 전사한 곳도 바로 이 지점이니, 신라군도 이 통로를 통과하여야만 백제를 침공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와같이 대전지역은 웅진 천도이후 백제와 신라와의 통로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으며, 대전 관내에 분포한 30여 개소의 산성들은 이를 감시할 목적으로 축조되었다고 하겠다.
대전관내 산성의 축조시기는 도성을 웅진으로 천도한 직후인 동성왕~성왕시에 집중적으로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