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평에 대한 여러 명칭을 검토한 결과 좌평의 명칭을 종래 『주례』 夏官 司馬의 직장에서 취한 것으로 보았으나, 좌평은 1품관이고 백제 초기의 최고관직인 左·右輔를 개편하여 설치된 점에 미루어 보아 오히려 총재 또는 재상의 직장을 뜻하는 ‘以佐天子理陰陽 平邦國’과 결부시키는 것이 보다 타당해 보인다. 그리고 좌평의 별칭인 ‘左率’이란 명칭을 통해 좌평이 솔계관등에서 분화되었음을 시사해 주고 있기 때문에 좌평제의 기원을 사비시대 주례주의 정치이념의 채용과 관련항려 보는 것보다는 솔계관등의 연원인 족장적 성격의 ‘率善’관직에서 찾는 것이 설득력 있어 보인다.
사비시대 전기의 좌평은 정원이 5명이었는데 상좌평에서 분화된 태(대)좌평과 상ㆍ중ㆍ하의 삼좌평은 귀족화의의 핵심 구성원인 동시에 합의방식에 의한 정책심의 의결권을 행사하였으며, 일반 좌평은 사안에 따라 특정업무를 관장하는 1품의 신분이었다. 좌평은 거의 유력한 대성귀족 출신이 임명되었는데 귀족회의나 삼좌평 합의체 운영을 통해 그들의 이익을 대변하였고, 때로는 왕권을 견제하는 역할도 하였다. 삼좌평 합의체는 직능분화와 권력분산을 통한 상호견제의 의미를 갖고 있다. 국왕 직속의 내정관부와 행정관부로 구성된 22부사와 이와는 다른 계통의 관직인 좌장, 내두, 영군, 내신 등을 통해 국가 행정업무를 집행함으로써 왕권 중심의 정치운영을 이루어 나갈 수 있었다.
한편 6좌평은 중국의 6전체제를 바탕으로 내두ㆍ영군ㆍ내신과 같은 백제의 전통적인 관직을 확대 개편하고, 이들 관직에 종래의 솔계관등을 격상시켜 좌평급을 임명한 데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정무를 직능적으로 분담한 6좌평 설치는 왕권강화와 관련이 있으며 백제 정치제도의 진전을 보여주는 것이다. 6좌평의 설치 시기와 좌평의 정원 철폐는 무왕이 왕성수리와 태자 책봉 등의 시책을 통해 왕권의 위상을 확고히 하는 무왕 30년대 전반경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무왕과 의자왕대에는 대성귀족 출신의 좌평이 증가하고 또 성씨의 중요성이 약화되는 가운데 좌평신분의 현저한 숫적 증가현상이 나타난다. 이에 따라 직책 없는 무임소의 좌평이 증가한 결과 좌평신분의 지위하락을 초래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사비시대 후기에는 직책 없는 좌평신분이 현저히 증가할 정도로 정원이 철폐되는 추세 속에서 특정한 정무를 담당하는 관직적 성격의 대좌평, 상좌평, 6좌평이 있어 국왕권력에 편제된 관료로서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국정을 총괄하는 최고 집정관인 대좌평과 좌평신분을 대표하는 상좌평은 재상의 역할을 수행하였고, 관료적 성격의 6좌평은 정무를 여섯으로 분담하여 국가정책을 심의 의결하는 정책결정기관으로서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6좌평의 하위 행정실무 기구인 22부사를 한 축으로 하여 왕권의 전제화를 이룩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