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왕의 출생지는 『신증동국여지승람』과 같은 史書가 아닌 후대의 地理書를 근거로 해서 익산 출생설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이는 무왕의 세력 근거지와 관련된 성장 설화일 뿐 출생지와는 무관한 것으로 밝혔다. 무왕의 출생지는 『삼국유사』에 보이는 “京師南池邊”라는 기록에 의할 때 당시 京師인 사비성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했음을 알 수 있었다. 물론 『삼국유사』의 이러한 기록은 상징성을 띠고 있는 설화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법왕의 서자인 무왕이 다른 지역이 아닌 부여에서 출생했음을 암시해 준다. 무왕의 즉위는 단명한 법왕의 정치적 입장과 무관할 수 없다고 본다. 살생을 금하는 令을 내렸던 법왕은 신라에 대한 보복을 지양하고자 했다. 이와 관련해 서동설화에 등장하는 무왕과 선화공주의 혼인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견해를 취했다. 법왕은 598년 對高句麗戰에서 승리한 기세를 타고 호국사찰인 鳥合寺를 창건했다. 신라 왕실에서는 법왕의 子인 무왕과의 혼인을 통해 백제와의 휴전을 도모하는 동시에 예전의 反高句麗 동맹관계를 복구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 같은 양국간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져서 무왕과 선화공주간의 결혼이 성사될 수 있었다고 보았다. 또 무왕은 신라 왕실의 지원을 유도하여 법왕의 적자들을 제끼고 즉위할 수 있었다. 그와 더불어 적자에 불과했던 무왕은 웅진성시대의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권력의 변두리로 밀려나 解氏와 苩氏세력 및 중국계 세력과의 연계를 통해 집권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위 전에 신라 왕녀와 결혼했던 무왕이지만 즉위 후 反新羅노선을 표출하였다. 그럼에 따라 그는 반신라적인 귀족들의 광범위한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이에 답하듯 무왕은 신라에 대한 선제 공격을 단행했지만 대패하였다. 그러나 초전의 패배를 통해 지배 세력간의 결속을 조성하는 전기로 삼았고, 주적을 신라로 설정함으로써 유례없이 맹렬하게 신라를 몰아붙였다. 신라 왕실을 처가로 한 무왕이었지만, 즉위 후의 정치적 입장은 신라에 대해서만 적대적이었다. 권력은 부자간에도 나눌 수 없다는 속설처럼 비정한 정치 현실을 目睹하는 것 같다. 그러나 또 그것이 바로 정치가 아닐까싶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