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머리말
II. 해동증자
III. 해동증자의 처자(妻子) - 요녀(妖女)·태자·왕자
IV. 맺음말
요약
해동증자로 불리었던 의자왕은 백제 귀족층이 효제에 입각한 유교정치문화에 익숙한 점을 정치의 자산으로 삼았다. 중국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했던 백제는 일본에 오경박사를 파견할 정도로 유교를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백제의 귀족층은 당시 동아시아의 학인들의 필독의 교양서였던 『논어』와 『효경』을 익히고 다른 경전과 역사서들을 배웠다. 그러므로 백제의 귀족들은 효제를 강조하는 각종 유교 경전을 읽고 그것을 실천에 옮기려고 노력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사회배경이 있었기 때문에 태자 의자는 효제를 체현하여 널리 민심을 확보하였던 것이다. 태자 의자가 부모에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가 있었다는 점은 즉위과정에서 부모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고 형제간의 반발을 미연에 방지하며 왕족간의 유대를 강화하는 성과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자 의자는 선왕인 무왕이 서거하자 무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순조롭게 즉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의자왕은 집권 초반기에 선왕의 유업을 받들어 신라에 대한 공세를 멈추지 않았다. 신라의 포위로부터 벗어나는 일은 선대로부터의 국가의 과제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책은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으나 집권 후반기에는 왕실의 적나라한 권력투쟁과 분열이 드러났다. 의자왕의 처인 군대부인 은고는 정치권력을 제멋대로 휘둘렀으며 의자왕은 궁녀와 음란하게 술을 마시는 생활로 세월을 보냈다. 그러므로 유교적인 여성관에 따라 그녀를 요녀라고 부르면서 그녀의 정권농단을 강하게 비판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태자의 교체로 인해 왕자와 왕족들 사이의 분열이 노골화되었다. 이러한 의자왕의 부도덕과 실정은 유교의 재이관에 의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의자왕 후기에 자주 보이는 재이는 바로 의자왕의 부도덕과 실정에 대한 백제인들의 깊은 실망을 표출한 것으로 보인다. 유교의 윤리와 문화는 의자왕이 성공하는데 크게 기여하였지만 그것은 의자왕의 부도덕과 실정을 비판하며 분열을 조장하는 비수가 되었던 것이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