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加耶史硏究의 新展開
Ⅱ. 磐井의 전쟁과 동아시아
Ⅲ. 倭의 佛敎受容과 동아시아
Ⅳ. 漢字文化의 受容과 韓半島諸國·倭
Ⅴ. 古代의 '大臣外交'
요약
6세기에는, 倭의 大王은 아직 日本列島에 있어서 후대 日本 律令國家 차원의 一元的인 중앙집권 지배를 확립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고, 三國이 대항하는 한반도에 있어서도 一元的인 중앙집권 지배가 반드시 완성되어 있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日本書紀≫ 繼體紀에 보이는 筑紫國造 筑紫君 磐井과의 전쟁은 6세기 초에 九州의 地方豪族이 스스로의 王國 형성을 지향하여 大王權力에 대항한 싸움이었다. 磐井은 新羅와 교류하면서 高句麗·百濟·新羅·加耶 등 諸國과의 外交權을 일시 독점하고, 筑紫·火·豊 지역에 그 세력을 과시하면서 大王과의 관계가 同盟에서 從屬으로 이행하는 것에 저항하였다. 中央의 有力豪族인 물부추록화가 大將軍으로서 파견되어 해를 넘기는 격전 끝에 磐井를 제압하고 北九州 땅에는 王權 직할의 屯倉이 설치되었다. ≪筑後國風土記≫와 古墳의 조사를 통하여, 磐井의 무덤인 岩戶山古墳에 보이는 政權構造와 그것을 중심으로 한 五~六世紀의 石人·石馬文化가 磐井의 勢力圈과 겹친다는 점이 분명하게 되어, 考古學的으로도 磐井의 전쟁을 뒷받침할 수가 있다. 百濟 聖明王에 의하여 倭로 불교가 '公傳'된 연대는 538년이라고 하는 사료와 552년이라고 하는 사료 두 계통의 사료가 있다. 百濟에서 倭로의 '佛敎公傳'의 배경에는, 高句麗·百濟·新羅 三國間의 긴박한 정세 속에 처한 百濟 聖王代의 위기가 존재하였다. '佛敎公傳'의 해로 되어 있는 兩年은, 538년은 高句麗 세력의 남하 압력을 받은 百濟가 熊津에서 사비로 천도한 해에 해당하고 552년(≪三國史記≫는 553년으로 되어 있음)은 中國과의 교류의 거점이 되는 漢城 지역을 新羅가 百濟로부터 빼앗은 시기에 해당한다. 高句麗·新羅로부터의 壓力에 대항하기 위해 倭와의 接近을 도모하는 百濟측으로부터 적극적으로 倭에 대한 '불교 공전'의 움직임이 일어났다고 하겠다. 古代 東아시아의 국가 간 외교에서는 외교 교섭은 皇帝와 國王 사이에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고, 執政大臣들이 외교를 담당하는 경우가 있어 이 '大臣外交'가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경우가 있었다. 6세기의 倭의 외교에서도 大伴氏에서 物部氏, 그리고 蘇我氏에게로 외교를 담당하는 中央의 有力豪族의 변천이 있었다. (필자 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