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머리말
2. 웅진 천도 이전 남방 진출 상황
3. 대산성 전투와 섬진감 상류 전출
4. 서남해안 일대의 복속과 지배
5. 탐모라의 복속과 의의
6. 섬진강 하류 지역의 복속
7. 맺음말
요약
백제의 웅진 천도 후 남방에 대한 진출과 영역화의 과정에 대해 살펴보았다. 백제의 남방 진출은 이미 근초고왕 때 시작된 것이지만, 南征과는 별도로 이후 이 지역을 유효한 영역으로 전환시키려는 필요성과 노력은 계속 제기되었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백제는 전지왕때 “동한의 땅”을 새롭게 개척하였다고 나오는데, 이림(임실)․감라(남원)․고난(곡성)의 ‘동한지지’는 섬진강 상류, 전라도 내륙의 지역으로서 백제가 소백산맥을 넘어서 함양→거창→합천이나 함양→산청→진주 등으로, 섬진강으로 남하해서는 하동→진주→함안으로 진출할 수 있는 주요한 통로였다.
이러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이후 백제는 정변에 의한 비유왕의 죽음과 개로왕의 등장 그리고 고구려의 한성 침공 등으로 혼란에 빠져 지방통제가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따라서 백제의 본격적인 남방 지배는 여러 가지 원인이 복합적으로 나타난 결과이지만 웅진으로 천도한 이후 가능할 수 밖에 없었다.
웅진 천도 초기의 혼란을 진압한 동성왕은 왕권 강화를 바탕으로 다시 남방 진출을 추진하게 되는데, 그 첫 시도가 바로 대산성 전투였다. 이를 통해 섬진강 상류 지역에 진출하게 되었고, 그 결과 동성왕 11년(489)에는 ‘남해촌인’으로 표현된 일단의 유력자가 복속을 청하는 등 백제의 영향력이 다시 남방의 재지 세력들에서 현저하게 증가하게 되었다. 이에 백제는 동성왕 12년(490)과 17년(495)에 김제․광주․나주 등 여러 지역에 왕․후제를 실시하여 지배력을 행사하게 되었고, 나아가 동성왕 20년(498)에는 탐모라(강진․해남)을 복속시키기에 이른다.
한편 동성왕의 뒤를 이은 무령왕(501~523)은 서기 508년에 바다 건너 탐라(제주도)를 복속시키는 한편, 대가야와의 전투를 통해 기문(남원)으로부터 대사(하동)에 이르는 섬진강 전 유역을 영역화할 수 있었다. 이러한 성공은 웅진 천도 이후 적극적으로 전개한 남방 정책이 커다란 성과를 거둔 것을 의미한다. 아울러 하동(다사) 지방의 재점유는 남해안을 통한 대왜 교통로의 장악과 함께 진주․함안 등 가야 지역으로 진출하는데 필요한 군사 전략상의 교두보 확보라는 점에서도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