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0년 당은 백제 古地에 郎將 劉仁願을 진수관으로 두고 지배하였다. 이때 유인원은 사비의 百濟府城에 진수했다. 백제부성은 백제멸망 후 당이 초기에 백제 고지를 어떻게 지배하였는지 알려주는 체제이다. 그리고 백제부성의 실체는 유인원의 관직변화, 黑齒常之의 관직인 절충도부위를 통하여 추정할 수 있었다. 이 시기 유인원은 「당 유인원기공비」와 『삼국사기』 '답설인귀서'에 모두 都護로 나온다. 그러나 「당 유인원기공비」의 도호는 그의 전공을 기록한 것으로 실제 그의 관등에 비해 과장된 것으로, '답설인귀서'의 도호는 662년 유인원이 이미 도독이 된 이후의 상황을 설명한 것으로 도호가 아닌 도독의 誤記로 추정되었다. 그렇다면 백제부성을 都護府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당이 백제 고지에 都督府체제를 실질적으로 실시하게 된 시기는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과 김인문 열전, 『자치통감』의 유인원 관련기록을 토대로 볼 때 662년 2월 이후이다. 결국 660년 백제의 사비성에 설치된 백제부성은 도호부도 도독부도 아닌 다른 체제를 의미한다. 이때 확인되는 것이 흑치상지의 도위라는 관직이다. 흑치상지는 664년 웅진에 도위로서 진수하였다. 그의 관직인 도위는 절충부의 도위를 의미하였고, 웅진도독부에 절충부가 있었다는 것을 내포하였다. 유인원 역시 과거 관직의 변화를 추적한 결과 그가 낭장이었던 660년 당시에는 도위직에 해당하였을 가능성이 큼을 상정할 수 있다. 즉 그는 백제부성에 도위로서 유진하였던 것이다. 이는 당이 백제 점령초기 백제 고지에 설치했던 백제부성의 성격이 당의 군진이었던 절충부였을 것을 뜻한다. 즉 당의 백제고지 점령 방식은 660년 백제부성에서 662년 2월 이후 웅진도독부성으로 전환하였다.
웅진도독부는 처음에는 백제부흥군에 의해 포위․고립되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663년 白江과 주류성에서 백제부흥군을 평정하고, 664년과 665년 신라와 웅령, 就利山에서 맹약한 이후 1도독부 7주 51현의 경계를 확정하고 새로운 지배방식으로 전환한 것으로 보인다.
663년 11월 백제부흥군을 토벌한 유인원이 당으로 돌아간 후 웅진도독은 백제부흥군과의 전쟁에서 큰 공을 세웠던 대방주자사 유인궤였다. 그는 백제 고지에서 본격적으로 당의 지배체제를 확립하고자 하였다. 또한 백제 토착세력들을 백제 고지를 다스리는데 활용하였다. 더욱이 그는 백제의 태자였던 부여융을 이용하여 백제 지역에 대한 통치를 용이하게 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그의 주청으로 이후 당은 부여융을 웅진도독, 흑치상지를 절충도위로 임명하여 백제의 민심을 웅진도독부로 모으는데 성공하였다. 즉 웅진도독부체제로 전환한 이후에도 백제부성의 절충부는 해체되지 않고 웅진으로 옮겨와 웅진도독부와 절충부의 이원적인 체제를 갖추게 되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필자 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