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머리말
II. 5세기 중엽 고구려의 백제 누침 여부
III. 백제와 왜국의 군사동맹 여부
IV. 왜왕무의 대송 교섭 의도
V. 맺음말
요약
고구려와 왜국의 관계를 해명하기 위한 첫 작업으로 왜왕무의 '고구려 정토'의 실재성을 증명하는 기본 논거를 비판적으로 검토한 뒤, 이를 기반으로 武가 시도한 대송 교섭의 의도를 규명하고자 했다.
우선, '개로왕의 상표문'에 제시된 고구려의 백제 침탈 '시기'라는 문제를 동시대 한ㆍ중 관계 사료와의 비교를 통해 살펴보았다. 그 결과, 개로왕이 고구려의 침탈의 시점으로 '풍씨의 종말기'를 강조한 것과 '30 여년에 걸친 침탈상'을 강조한 것이 모두 북위를 대상으로 한 '외교적인 수사'에 불과한 것임을 밝혔다.
다음으로, 고구려를 둘러싼 동아시아 제국의 움직임을 통해 백제와 왜국의 '군사동맹' 여부를 살펴보았다. 이 경우, 개로왕이 구상한 '반고구려군사동맹'의 구도가 남으로는 신라, 북으로는 물길과 북위에 이르렀음을 추론해 냄으로서, 왜국이 '반고구려군사동맹' 구도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음을 명시했다. 더구나, 5세기 초 이후에 전개된 고구려와 백제의 어떠한 전투에도 왜군이 개입한 흔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따리서, 5세기 초이래 백제와 왜국이 고구려에 대한 '군사동맹' 관계를 지속적으로 유지하고 있었다고 보기는 무리가 따름을 확인했다.
이러한 검토를 통해, 무의 대송 상표문의 실재성을 논증해 온 기존의 두 가지의 논리-백제와 '군사동맹' 상태였던 왜국이 430년대 말 이래 고구려의 공격 대상이 된 백제를 구원하기 위해 고구려 정토를 계획하고 실행에 옮기려 했다-가 가진 문제점을 분명히 제시했다.
마지막으로, 두 가지 전제에 대한 검토에 기초하여 武가 시도한 대송 교섭의 의도를 살펴보았다. 상표문에 제시된 무의 요청 사항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고구려 정토'에 대한 원조였는데, 이것은 송을 둘러싼 당시의 주변 상황을 고려할 때 현실에 기반을 둔 요청이었다고 보기 어렵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다른 하니는 장군호와 관직호를 요청한 것이다. 이 경우, 정변을 통해 왕위에 오른 무(웅약천황)가 왕권의 강화와 왜국 내부의 결속과 통합을 지향하고자 본인과 속료의 관작 수여를 요청한 것임을 명시하였다. 따라서, '고구려 정토'를 주장한 무의 상표문 내용이 '고구려'와 '왜국' 관계의 실태를 반영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필자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