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I. 기원 전후의 말갈관계기사
II. 3세기의 말갈관계기사
III. 4세기 이후의 말갈관계기사
맺음말
요약
백제본기의 말갈관계기사는 기원전후와 3세기 그리고 4세기 이후의 세 시기로 나누었지만, 실제로는 4세기 이후의 기록은 기년 그대로 믿을 수 있었고 그 이전의 기록은 의문이어서 초기기록으로 규정하였다. 그것은 4세기 이후의 말갈관계기사가 4세기 말엽과 6세기 초엽의 시기에 한정된 것으로 되어, 4세기 전․후반과 5세기의 말갈관계기사가 보이지 않는 불균형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말갈관계기사의 초기기록을 분석해 본 결과, 기원전후와 3세기의 기록은 각각의 특성이 있었다. 기원전후의 말갈관계기사는 전반부의 경우 말갈과 낙랑의 연계에 의한 백제 공격이었고, 후반부는 말갈 단독으로 백제를 공격한 것이었다. 말갈관계기사의 공통된 특징이 기병에 의한 군사활동이었으므로, 그와 같은 전술이 가능한 시기는 빨라도 4세기 이후에 해당된다. 또한 전투 범위도 한강 이북의 경기북부지역과 강원북부지역이었으므로, 3세기의 마한 소국단계에 머물렀던 伯濟國이 수행한 전투가 아니며 4세기 이후 백제국가로 성장한 이후에 해당된다. 말갈․낙랑 연계 기사에서의 낙랑은 중국 군현인 낙랑군이 아니라, 314년 고구려가 이들 군현을 점령한 이후의 낙랑지역을 의미하였다. 낙랑지역은 4세기 중엽까지 고구려가 망명집단에 의해 위임통치가 행해졌고, 고구려는 그들의 지배지역인 함경도지역의 말갈집단을 동원하여 낙랑지역의 세력과 연계하여 급격하게 성장하는 백제를 견제하도록 한 것이다. 이후 고구려가 낙랑지역을 직접 지배하게 되었는데, 이후부터 고구려의 백제에 대한 압박은 고구려가 직접 수행하거나 때로는 말갈집단을 동원하였다. 4세기 후반의 말갈 동원은 기원전후의 말갈단독기사이고 5세기의 말갈동원은 3세기의 말갈관계기사로 보았다. 고구려의 백제 압박은 주로 말갈을 동원한 것인데, 그 이유는 고구려가 4세기 이후 전연 전진 후연 북위 등 서방의 국가들과 대립 교섭하는 일에 주력하기 위한 때문이었다.
이와 같이 말갈관계기사의 초기기록과 4세기 이후의 기사를 대비해 보았는데, 초기기록도 사료적 가치가 없는 허구의 기록이 아니라 4세기 이후의 사실로 볼 수 있는 것이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