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백제 부흥운동과 웅진도독부에 대한 재평가의 필요성
II. 당의 백제점령과 백제 부흥운동의 시작
III. 백제 부흥운동의 전개와 부여륭의 활동
IV. 당의 백제 지배정책과 웅진도독부의 성격
V. 백제 멸망의 시기와 역사적 의미
요약
백제 부흥운동 관련 연구를 보면, 부흥운동의 범주가 대개 복신과 도침, 부여풍만으로 한정되어 있다. 그러나 본고에서는 웅진도독부의 존재와 부여륭의 활동도 또 하나의 백제 부흥운동으로 편입시켜주는데 인색해서는 안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몇 가지 주제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첫째, 백제의 부흥운동은 백제지역에 남겨진 유민과 중국으로 끌려간 유민이라는 성격이 다른 두 세력에 의해 다르게 전개 되었는데, 전자는 3년 정도의 짧은 기간에 끝났지만, 후자는 10년이 넘는 기간동안 웅진도독부 체제를 유지하며 신라에 대항함으로써 어느 정도 성공적인 모습도 보여주었다
둘째, 부여륭이 당나라에 철저히 순종하는 모습은 그가 중국의 東以制夷 정책에 이용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이 택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 당의 도움을 받는 것이었기에 스스로의 능동적인 노력도 그 속에 담겨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 결과 부여륭은 웅진도독의 자리에까지 오르는 성공을 거두게 된 것이다.
셋째, 웅진도독부를 괴뢰정권으로 간주하는 분위기가 강하지만, 여기에서는 이중적인 성격 또는 이원적인 구조로 파악하였다. 즉, 군사업무을 관장하던 유인원이나 유인궤 중심의 체제와 군사력을 중국에 의존하면서도 행정적으로는 독자성을 확보하려 노력한 부여륭 중심의 체제로 구분하였다.
넷째, 한반도에서 밀려난 웅진도독부는 676년 2월 만주 建安의 故城에 재건되었다. "그 땅은 이미 신라와 발해와 말갈이 나누어 가져 백제의 國系는 끊어지고 말았다"는 기록은 백제 본토만이 아니라 건안 고성의 웅진도독부까지 포함시키는 경우 쉽게 이해가 간다. 따라서 만주 건안 고성의 웅진도독부도 그 존재성을 인정해 줄 수가 있고, 그렇다면 백제의 국계는 이곳 만주에서 마지막으로 끊어졌다고 보아도 좋을 것 같다. (필자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