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1. 대당외교의 소극화와 지속적인 신라 공격
2. 대당외교의 중단과 고구려·왜와의 연합 모색
3. 고구려·왜와의 연합정책
맺음말
요약
백제의 대외정책을 주로 국제정세와 연관시켜서 3개 시기로 나누어 검토해 보았다. 당의 고구려원정 전까지만 해도 백제는 외교적으로 신라보다 당과 밀착하고 있었으나, 이후 신라에 유리하게 상황이 바뀌었다. 당의 상황이 한반도 문제에 개입할 여력이 없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에 백제는 대당외교를 중단하고 신라에 대한 공격에 치중하였으나, 결과적으로 실패하면서 타격을 입게 되었다. 그 결과 전쟁에 대한 반대 여론이 커지면서 대당외교의 재개가 필요하게 되었을 것이다. 한편 백제의 대왜외교는 대화개신 이후 왜에서 친백제세력의 입지 약화와 신라의 적극적인 대왜외교로 인해 위축되었다.
당 고종의 즉위 이후 5년여 간은 동아시아에 소강상태가 도래하였다. 이때 백제는 당과의 관계를 회복하고자 하였으나 실패하였고, 신라는 적극적인 대당외교를 전개하면서 제도 개혁에 힘을 기울였다. 그 결과 백제는 652~654년경에 고구려와의 연합을 모색하였고, 대왜외교에 보다 집중하게 되었다. 당시 왜의 여전한 균형외교에도 불구하고, 친백제세력의 입지가 강화되면서 백제는 대왜외교에서 신라의 입지를 좁혀가고 있었다.
655년 백제·고구려·말갈의 연합군이 신라의 북쪽 변경을 침입하여 30여 성을 빼앗았다. 이 때 당은 측천무후의 등장을 전후하여 지배세력의 교체와 대내 문제의 해결 등을 마치게 되었고, 대외전쟁을 할 수 있는 여력이 생겼다. 백제와 고구려는 전쟁에서의 성과 때문에 이전 시기보다 적극적으로 전쟁에 임할 수 있게 되었다. 한편 이 시기에 신라가 대당외교를 독점하게 되면서 나당동맹군의 백제 공격은 어느 정도 가능성이 생겼다. 신라가 대왜외교를 중단한 이후 백제와 고구려는 적극적으로 그것에 나섰는데, 특히 왜의 견당사 행로가 신라에서 백제로 바뀐 점은 주목할 만하다. 그러나 왜의 백제 출병은 반드시 백제와의 우호관계에 기인한 것이라고는 보기 어렵고, 왜 내부의 정세도 많이 감안한 것이었다. 또 당을 포기하고 고구려·왜와의 연합을 추진한 것도 당시 정세로 볼 때 실책이라고 보기는 어려우나, 보다 긴밀한 협조체제를 구축하지 못한 것은 실책이라고 할 수 있었다.
백제의 멸망과정은 실제 전쟁의 과정이 10일 내외일 정도로 매우 짧은 기간에 이루어졌다. 이것은 나당동맹군이 왜 사신을 감금할 정도로 보안을 철저히 유지하면서 기습적으로 공격한 까닭도 있겠지만, 가능성이 점점 높아지는 나당동맹군의 공격을 거의 대비하지 않았던 점이 훨씬 컸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왜 백제가 그토록 긴박한 상황에서 대내적으로도 대외적으로도 대비를 소홀히 하고 있었는가는 당시 백제의 정치정세와 연관시켜 파악해야 할 것이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