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세기부터 6세기, 중국 동북지방부터 한반도 북부를 영유하고 있던 고구려의 비약적인 영토확장은, 한반도 남부의 백제, 신라, 가야제국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4세기 후반부터 북방의 대국 고구려와 적대하고 있었던 백제는 왕도가 함락 당하여 남방으로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백제와 함께 고구려와 적대하고 있었던 가야제국은 백제의 패배와 남방으로의 후퇴로 인해 직접 고구려의 위협에 처하게 되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대가야를 중심으로 한 가야제국은 「대가야연맹」을 형성하여 고구려와의 대립자세를 보였다. 그러나 그 가야제국의 움직임은 세력을 회복시켜가고 있던 백제에게 위험시되어, 백제의 남방진출 정도가 강화됨과 동시에 양국은 대립해 나갔으며 그로 인해 다시금 「대가야연맹」은 보다 결속을 강화해 나갔다고 생각된다.
한편 신라는 그 동안 고구려에 대한 종속으로부터 저항으로 전환하여 세력을 서서히 확대시켜 갔으며 가야제국에 대해서도 군사적으로 압박하여 갔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백제 성명왕을 중심으로 「임나부흥회의」가 개최되지만, 그것은 백제의 안라 지방 진출책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한 가운데 각국은 자존의 길을 추구하며 활동하였는데, 대가야는 백제 우선의 전략을 취하고, 안라는 신라, 백제, 고구려와의 통계를 획책하고 있지만, 그것은 그러한 다양한 활동의 하나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백제와 신라의 가야지역으로의 진출은 5세기 중엽의 고구려 남하에 의해 일시적으로 둔화한다. 그 후 「北敵」 고구려의 남방 거점이었던 서울지방을 탈취한 신라는 가야지역으로 진격하여 해당 지역을 지배하에 두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가야제국의 동향은 그것과 밀접하게 관계하는 백제와 신라만이 아니라. 양국의 대외정책에 커다란 영향을 준 고구려의 활동과 관련하고 있다. 본고에서는 그 점을 감안하면서 가야제국의 사적 전개과정을 논하였지만, 자료의 부족도 있고, 추측에 기대지 않을 수 없었던 부분도 많다. 또 『일본서기』기사의 고증도 충분하지 않은 부분도 있을 것이다. 게다가 고고학 성과를 충분히 참조, 활용할 수 없었던 점 등 문제는 있지만, 그것들에 대해서는 금후 검토과정으로 할 것을 약속하겠다. (필자 소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