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학적 성과를 바탕으로 무왕의 익산경영 문제를 사비기 대내외적 정치상황과 관련하여 살펴보았다. 먼저 무왕의 즉위배경 및 익산경영과 관련하여 사비천도 이후의 정치상황을 정치적 변동과 관련하여 살펴보았다. 왕도의 이동은 특히 정치세력의 변동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데, 성왕의 사비천도 이후 왕족과 사씨세력의 정치적 영향력이 증대되었다. 그러나 관산성 패전이후 왕권의 위축을 초래하였다. 당시의 정치상황은 위덕왕의 노력으로 안정을 회복하였으나 혜왕과 법왕이 즉위하면서 다시 정치적 변동이 초래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의 왕위계승이 자연스러운 계위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법왕은 무왕과 그를 지지하는 귀족세력에 의해 제거된 것이 아닌가 한다.
무왕은 위덕왕의 왕자인 阿佐의 소생이거나 위덕왕 자신의 庶子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리고 무왕은 자신의 정치적 역량, 그리고 익산지역에 재지기반을 둔 정치세력과 해씨 등의 지지에 의해 법왕을 제거하고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그는 즉위 이후 익산경영에 심혈을 기울였는데 이를 통해 세력재편을 꾀하고, 아울러 왕권강화를 도모하고자 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무왕이 익산경영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왕 3년 小陁城등에서 벌어진 전쟁에서 패배한 이후로 추정된다. 그리고 익산지역에 다수 분포하고 있는 백제말기의 유적․유물은 무왕에 의해 익산 왕궁성이 조영된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다만 익산지역에 천도를 목적으로 경영되었는가 하는 점은 향후 축적된 고고학적인 성과를 통해 규명될 수 있을 것이다.
무왕은 재위 말기에 와서 사비왕도를 재건하고 있는데, 이는 의자의 태자 책봉 이후 정치상황의 변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사실은 친위정변을 통해 왕권강화를 추진한 의자왕 초기의 정국상황을 통해서도 추정해 볼 수 있다. 그 결과 태자이던 의자와 사비세력에 의해 익산에서 다시 사비로의 환궁이 이루어지게 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결국 의자왕의 친위정변으로 익산세력이 몰락하고, 사씨를 중심으로 한 사비세력이 중앙정치를 장악함으로써 익산 왕궁성의 기능은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의자왕과 사비세력은 익산 왕궁성에 사찰을 조영하여 왕궁성으로의 기능을 정지시킴으로써 익산세력의 정치적 재기를 차단하고, 아울러 무왕을 위한 추모의 공간으로 변질시켰던 것으로 이해된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