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고는 중국 정사 백제전에 반영된 시조 인식의 변화상과 시국자로 기록된 구태 관련 기사의 출현 과정을 고찰했다. 곧 5세기 후반 편찬된 『송서』부터 독자적인 백제전이 설정되었으나 출자나 시조에 대해서는 함구한다. 한편 6세기 중반 편찬된 『위서』는 개로왕이 보낸 表에 근거하여 ‘백제국 선의 출자는 부여’라고 하였다. 그런데 당시 백제 사신 여례는 魏主에게 ‘(백제의) 過去事를 모두 열거(具列往代之迹)’했고 『위서』 편찬자가 夷族의 출자와 시조에 대해 높은 관심을 갖고 있었음을 감안하면, 당시 백제는 그들의 선이 부여이며 부여 시조 동명을 백제 시조로 내세우는 데 그쳤던 것 같다. 반면 『위서』의 뒤를 잇는 『주서』는 “백제의 선은 마한의 속국이며 부여의 별종인데, 구태가 대방에서 시국했고, 시조 구태묘에 사시로 제례함”을 서술했다. 이는 개로 왕 이후의 어느 시점에서인가 백제 지배층이 시국자로서 구태를 구체화하고 동시에 구태묘가 설치되었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연장선상에서 구태묘의 설립을 보면, 정치 개혁을 통해 왕권을 강화한 성왕이 梁에서 수용한 ‘三禮’에 입각하여 새로운 중국적 시조관의 채용과 더불어 구태묘를 설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이해가 당시 사실에 적중한 것이라면, ‘삼례’의 『예기』나 『의례』의 규정에 의거하여 백제사 속의 태조이자 시국자로 이해될 만한 인물을 구체화해 볼 필요가 있다. 그 결과 양으로부터의 始封之君인 武寧王 또는 무녕왕의 親父로 중국에 알려진 東城王牟大 그리고 부여사상 주목할 만한 위상을 가진 尉仇台 등이 주인공이 될 수 있다. 사실 성왕대 사비 천도와 남부여로의 국호 개칭이라는 사회적ㆍ정치적환경 변화를 주목할 경우, 중국적 예제에 입각한 종묘의 구성 과정에서 부여왕 위구태가 태조로 추존되었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 더구나 『수서』 이후 다수의 중국 정사 백제전 찬자들은 『주서』백제전의 시국자 구태를 부여왕 위구태로 이해한다.
그런데 남부여로의 국호 개칭과 새로운 시조관의 수용 및 고구려와의 경쟁의식 속에 위구태가 새로운 시국자로서 설정되었지만, 백제사상 실질적인 건국자로서의 위상을 갖는 것은 아니었다. 이에 성왕대로부터 오래 지나지 않아 구태의 위상은 허구성으로 인한 공감대의 부족으로 宗廟에서 훼철되었으며 멸망기나 그 이후 사적에 남지 않게 되었다. 그러므로 국내에 구태에 대한 고유 전승이 부재했고, 『三國史記』 찬자들은 東明ㆍ溫祚ㆍ沸流 등과 비교하여 구태를 ‘未知孰是’ㆍ‘不可信’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필자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