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머리말
Ⅱ. 중국의 百濟遺民 관련 金石文
Ⅲ. 禰寔進 墓誌의 내용과 백제
Ⅳ. 맺음말
요약
최근 중국 서안에서 출토된 禰寔進 墓誌石은 부족한 백제사 연구자료를 보완해 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禰寔進과 대응할 수 있는 인물로 ≪舊唐書≫<蘇定方列傳>에 보이는 백제 大將軍 禰植을 들었다. 즉, 禰寔進과 禰植을 동일한 인물로 보았다. 禰植은 백제의 북방성인 웅진의 방령으로서 의자왕을 사로잡아 당에 투항한 장수였다. 이러한 공로로 당에서도 고위직에 등용된 것으로 보았다. 예식진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웅진도독부에서 백제의 좌평을 칭하면서 당과 왜와의 외교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였고, 당과 신라와의 전쟁에서 인질이 되는 고초를 겪기도 하였다. 또한 예군이 예식진일 가능성에 대해서도 살펴보았다. 그러나 예군은 백제 고토인 웅진도독부에서의 활동 이외에 당에서의 행적이 전혀 알려져 있지 않지만, 672년 예식진의 사망 이후에도 신라에 억류되었다가 신라사신과 함께 당에 송환되는 것으로 보아 예식진과 동일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밝혔다. 예식진 묘지석의 발견으로 문헌 자료에 기록된 예식과 예군 등은 이름만을 기록한 것이 아니고 성이 예씨이고, 이름이 식 또는 군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게 되었다. 특히 예군의 경우 《삼국사기》신라본기와 《일본서기》에 백제 사마 예군을 칭군 또는 장군으로 판독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확인한 것도 매우 중요한 성과이다.
묘지석이 발견된 예식진은 결국 의자왕을 사로잡아 투항한 웅진방령 예식과 동일인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예식(예식진)․예군과 같은 예씨 집단은 대대로 백제에서 좌평직을 세습하였지만 백제 멸망에 적극적인 공을 세운 대가로 당 왕조에서도 일정한 대우를 받았던 것이다. 예식진과 예군 등 좌평 관품을 세습하던 백제의 또 다른 대성으로 볼 수 있는 예씨는 당 왕조에 협력하면서 당 조정과 웅진도독부에서 고위직으로 활동하였다는 새로운 사실을 알려준다. 예식진 묘지의 발견은 또한 지금까지 알려졌던 백제 좌평의 성격에 대해서 별도의 이해를 촉구하는 자료로 충분하다. 이에 대해서는 별도의 고찰이 필요할 것이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