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머리말
Ⅱ. 주민구성
Ⅲ. 귀족의 성씨
Ⅳ. 귀족가문의 出自
Ⅴ. 맺음말-백제 성씨의 특징
요약
백제의 주민구성과 귀족 가문의 성씨들을 살핀 후 이를 토대로 유력한 귀족가문의 출자를 주민구성과 연계하여 살펴보았다. 이를 바탕으로 백제 귀족가문의 성씨가 보여주는 특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대성팔족을 비롯한 백제 귀족가문의 출자는 다양하였지만 중심을 이룬 것은 왕족 부여씨 계통과 한계 및 예계였다. 여기에서 출자한 귀족가문 인물들이 백제사회를 운영하는 중심축을 이루었다.
둘째, 한성도읍기에는 한강유역권에 기반을 가진 가문들이 정치 운영의 핵심을 이루었다. 진씨, 해씨, 목씨 등의 활동이 이를 보여준다. 그러나 웅진 및 사비도읍기에는 금강유역권에 기반을 가진 세력들이 두각을 나타내었다. 그리하여 사씨, 연씨, 백씨 출신 귀족들이 이 시기에 등장하여 중요한 직책을 맡아 활동하였다. 이는 한성에서 웅진으로의 천도가 귀족가문의 세력에 변화를 가져왔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셋째, 대성팔족 속에는 중국계나 왜계 성씨가 보이지 않는다. 중국계나 왜계 인물이 백제사회에서 고위직을 맡기도 하였으나 대성팔족에 속하지는 못하였다. 이는 대성팔족이 한계, 예계 중심으로 이루어졌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넷째, 백제의 귀족가문 가운데 특히 왕족의 경우 분지화 현상이 두드러진다. 분지화 현상은 고구려나 신라의 경우에도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백제처럼 많은 사례를 찾을 수 없다. 이는 백제 왕실의 골족의식의 강화와도 관계되지 않을까 한다.
다섯째, 백제 귀족의 성씨에는 복성이 많아 보인다. 그런데 이 복성은 고구려에도 나온다. 따라서 백제의 복성은 부여적 전통이라 할 수 있다.
여섯째, 백제는 중국 문화의 영향을 받으면서 점차 중국식의 단성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그렇지만 백제는 말기까지 복성의 전통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백제가 중국식 단성을 차용한 것은 자신의 문화적 전통의 기반 위에 중국 문화를 받아들이는 방편에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다.
일곱째, 한성도읍기에 진씨 세력은 정치 운영의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이 시기에 백제와 고구려는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그러나 전지왕의 즉위를 계기로 해씨세력이 정치적 주도권을 잡았다. 해씨세력은 고구려에 대한 강경책을 추구하지 않았다. 이리하여 백제와 고구려와의 관계는 일정기간 동안 소강상태로 들어갔다. 진씨 집권 시기와 해씨 집권 시기에 보이는 이러한 대고구려 정책의 차이는 당시의 정치적 상황에서 비롯되었을 것이지만 여기에는 예계 출자인 진씨와 부여계 출자인 해씨의 고구려에 대한 인식의 차이도 일정하게 작용을 하지 않았을까 한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