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는 처음 비류온조 형제에 의해 공동 통치를 받았거나 형제상속 원리에 의해 비류 이후 왕위가 온조로 계승되었거나 했던 것이 아닐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국사기에 온조 건국 및 직계비속이 왕위를 독점한 것으로 기록된 것은 온조계통에 의해 왕위가 독점된 시기에 왕통계보가 개작 정리된 결과가 아닐까 싶다.
백제가 한강 하류 일대에서 연맹왕국으로 성장한 것은 3세기이며 비약하게 된 직접적 계기는 중국군현 당국과의 대규모 군사적 충돌 때문이다. 백제의 급작스런 성장 발전은 인접한 군현 당국, 동예 등에 대해 경계와 위협의 대상이 되었고 이들은 백제를 자주 침범하였다. 책계왕이 동예를 앞세운 군현세력의 침략으로 전사하고 분서왕 역시 낙랑태수의 자객에 의해 죽음을 당하는 등 백제 국력 성장에 일정 한계가 있었다. 이에 백제는 마한세력을 완전히 병합하여 중앙집권국가를 건설해야 했다.
4세기 들어서 백제는 중국군현세력으로부터 받아온 정치적 압력에서 벗어나 적극적 대외팽창을 꾀하였다. 근초고왕대 신라에 사신을 보내 빙문하거나 양마를 주는 등의 친선관계를 꾀하였다. 고구려와는 낙랑, 대방 2군이 멸망이후 군사적 충돌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삼국사기에도 당시 백제와 고구려 사이에 잦은 전투가 있음을 알 수 있으며 한수 남쪽에서 군사를 크게 열병하고 황색 깃발을 사용한 것을 볼 때, 근초고왕대 백제가 마한의 황제가 됨을 보여준다. 다만 고구려는 옛 대방군 지역으로의 백제의 진출에 대해서는 단호한 태도를 보이며 전쟁을 펼쳤으나 백제는 신라와 우호관계를 맺고 대방고지로 진출하여 치열한 공방 끝에 평양성 전투 승리라는 성공을 거뒀다. 이후 백제는 중국에 대한 외교적 활동을 개시하여 372년 동진과 정식으로 수교하였고 동진은 근초고왕을 영동장군, 영낙랑태수라는 관직을 제수하였다.
근초고왕대 이같은 영역확장은 마한세력을 모두 정복, 병합한데서 우러나온 힘의 결집으로 생각된다. 삼국사기에는 마한정복 사실이 온조왕대의 사실인양 기록했으나 일본서기 신공기 기사를 비판적으로 검토해보면 근초고왕대 마한세력을 완전히 병합하여 전남 해안지방 및 제주도까지 세력을 뻗친 것을 알 수 있다. 백제국의 성장을 단절설 입장에서 볼 때, 근초고왕이나 비류왕은 백제 역사상 부여족의 남하 이동에 의한 정복왕조의 창시자라는 느낌이 든다. 이를 고이왕 이래 발전의 연장선상으로 파악할지 새로운 정복왕조의 등장으로 볼지 흥미있는 수수께끼이다. (연구원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