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머리말
II. 건국설화의 형성과 온조왕
III. 온조왕대의 통치 기반 구축
IV. 온조왕에 대한 인식과 평가
V. 맺음말
요약
온조왕의 업적과 그에 대한 史家들의 인식과 평가를 살펴보았다. 먼저 건국신화의 형성 과정을 통해 온조왕이 근초고왕대의 역사 정리 작업에서 백제의 시조왕으로 자리잡게 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해 보았다.
『삼국사기』백제본기 온조왕조를 검토해 보았을 때, 일정한 통치 공간 속에서 통치행위가 발전적으로 이루어지는 건국기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후대의 기록이 삽입되었을 가능성은 적어보인다. 『삼국사기』에 온조 중심의 건국설화가 남겨져 있다는 것은 백제 당대인이 온조를 백제의 건국자로 인식했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러한 인식이 근초고왕대의 역사 정리 작업에서 이루어졌고, 이것이 후대에도 이어져 『삼국사기』에 전사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백제가 신라에 의해 멸망하게 됨에 따라, 백제의 역사와 온조왕에 대한 평가는 신라인의 손에 의해 다시 정리되었을 것이다. 이때 백제의 건국신화에서 신화적인 요소가 탈락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삼국사기』백제본기에 보이는 온조왕의 이미지는 초월적인 신통력은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사냥에 능했을 뿐 아니라 빼어난 군사적 능력을 갖춘 왕으로 묘사되어 있다. 고려시대의 기록들은 삼국이 역사를 기록하면서 고구려나 신라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백제의 역사를 소략하게 기록했지만, 건국자로서의 온조왕의 능력에 대해서는 높이 평가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백제 온조왕의 처음 도읍지를 직산으로 이해해서 세종 때에 그곳에 묘를 두어 제사함으로써, 온조왕을 백제 시조로서 기억했다. 그리고 선조 때에는 방위성으로써 남한산성을 중시하면서 남한산성이 온조왕의 도읍지였던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근초고왕대 한산으로 이도했을 때 온조 사당을 마련한 유습이 조선시대까지 이어졌다가, 호란을 당하여 인조가 피난했을 때 온조왕이 현몽함으로써 그를 백제 시조왕으로서 국가에서 제사를 받들게 되었다. 따라서 인조 이후 백제 온조왕은 ‘호국의 조상신’으로써의 의미도 가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에는 백제사에 대한 연구나 인식이 미약했음을 알 수 있었다. 조선 후기에 와서 실학자들은 삼국시대를 조명해 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꾸준히 진행되지 못하였고, 여러 차례 병란을 통해 많은 서적이 손실되었기 때문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