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패망에 대해서 선학들에 의해 여러 가지 견해가 수긍되었지만 실체를 논증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본고에서는 백제의 패망원인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대외적인 원인을 살펴보면 우선 북수남진정책을 수행하던 고구려세력을 방어하지 못한데서 비롯된다. 치양성 전투에서 승리하였지만 이후 광개토왕의 침공을 방어하지 못하였고 그 이유는 백제의 자만과 사치 때문이다. 고구려와 대결할만한 국력은 기르지 않고 의욕만 앞세워 병마를 징발하고 전쟁만 일삼았고 고역에 견디지 못한 백성이 국외로 탈출하기도 하였다. 또 도교적 사상의식에서 발로한 왕궁의 사치 등이 문제가 되었다.
475년 웅진천도는 백제 흥망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고 551년 성왕의 한강유역 회복 이후 신라에 의해 탈취당하고 신라가 나제동맹을 파기한 것은 이미 신라가 백제 국력을 무시하였기 때문이다.
백제의 북위,송에 대한 외교는 고구려의 견제로 효과를 거둘 수 없었고 수와는 삼국 중 가장 성곡적인 외교를 거두었으나 백제사회의 허약성으로 말미암아 수와 함께 고구려를 공벌하지 못했다. 수와의 약속위배는 백제의 대당외교에 절대적 영향을 미쳐 그 주도권을 신라에 상실당하였고 결국 나당의 침공을 받게 되었다.
또한 백제 지배층이 사치와 향락에 빠져 민정을 소홀히 함으로서 백성들은 위정자를 불신하게 되었고 이는 4세기 경부터 이미 시작되었으며 끝내 유망하였던 것이다. 백제인들은 백제의 폭악스런 정권이 망하고야 만다는 위기의식과 말세관을 가졌었다. 이같은 위기의식은 지배자들의 무도한 사치와 향락으로 폭정만 일삼았기 때문이다. 의자왕은 왕서자 41인을 좌평으로 삼아 식읍을 주는 등 주요 관직이 왕자 중심으로 배분되어 폐쇄적 왕가중심 통치체제 등의 독재는 백제의 패망요인의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백제정권이 패망되자 백제부흥의병이 사방에서 봉기하여 약 4년간 항전하였는데 이는 백제민에게 애국적정열이 최후까지 남아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결국 백제민은 백제국을 버리지 않았지만 당시 집권자들은 권력을 향락의 수단으로 삼고 국민을 무시했기 때문에 스스로 자기네들의 멸망을 자초했을 뿐 아니라 끝내 백제국과 국민가지 패망하도록 유도했다. (연구원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