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머리말
Ⅱ. 樂浪을 통한 書寫文化 유입
Ⅲ. 高句麗의 書寫文化 교류
Ⅳ. 百濟의 書寫文化 교류
Ⅴ. 新羅의 書寫文化 교류
Ⅵ. 맺음말
요약
고조선과 삼국을 잇는 연결고리로서 낙랑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낙랑의 유물로 전해지는 石碑를 비롯한 인장과 봉니 등은 당시의 書寫文化를 전해주는 대표적 유물이다. 특히 秥磾縣神祠碑 명문은 體勢와 風格이 광개토태왕비체와 비슷한 느낌인데, 이는 낙랑 와․전 명문의 제작 방법과 서풍이 고구려와 유사한 것과도 맥락을 같이한다. 이와 함께 주목되는 것은 인장과 봉니이다. 봉니는 簡牘의 발송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문서행정을 통해 낙랑 서사문화의 확산을 추측해 볼 수 있는 자료이다.
낙랑 지역에서 활발한 문서행정이 시행되고 있을 무렵 삼국 지역에서도 서사문화가 확산되었다. 문서행정 시스템의 정비와 함께 고구려에서 서사문화에 대한 인식과 발전이 급속하게 진행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4세기 이후 書體演變이 중원과 비슷하게 진행되고 있는 점은 이를 말해 주는 것이며, 이는 또한 고구려의 서사문화가 당시 동아시아 서사문화의 보편적 수준에 도달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백제는 6세기까지도 남조풍이 주류를 차지하고 있는데, 사비시기에 이르러 북위풍이 점차 증가하는 경향이 있고, 고구려에서 사용된 자형도 나타나고 있다. 이렇듯 주변국과 다양한 외교를 펼쳤던 백제는 문화적 다양성과 국제성을 보여주고 있다.
반면에 신라는 낙후된 상태가 지속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5세기 전반까지 신라는 정치적 문화적으로 고구려의 영향을 받고 있었으나 5세기 중반 이후 우호적 관계가 깨어지고, 고구려의 영향을 받던 신라의 서사문화는 일종의 자체적 고립상태에서 토착화 과정을 겪는다. 그러나 여전히 고구려 계통의 특징이 비교적 강하게 남아 있다.
6세기 중엽 신라의 서사문화는 남북조와의 교류 등을 통해 새로운 서풍을 선보이는데, ‘赤城碑體’가 그것이다. 적성비체는 남북조 서풍과 토착 서풍이 융합되어 변용된 것으로 신라의 서사문화가 당시 동아시아의 보편적 수준에 편입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이후 신라의 서사문화는 세련된 풍격의 해서가 나타난다. 이러한 풍격은 적성비체와는 확연히 구분되는 것으로 남조와 활발한 교류를 통해 신라의 서사문화가 급속히 발전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6세기말 이후 신라는 문서 활용 수준이 급속하게 향상되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러한 서사문화의 저력으로 7세기 이후에는 당과 다양한 문서외교를 전개하여 삼국항쟁기의 주도권을 장악했던 것으로 보인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