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머리말
II. 百濟 始祖 關聯 記錄과 東明
III. 『周書』·『隋書』 百濟傳의 始國者 仇台
IV. 『三國史記』 百濟本紀의 建國者 溫祚
V. 맺음말
요약
현전 기록에 백제 시조로서 소개된 이는 東明·溫祚와 仇台 등이었지만 이들이 百濟史에서 차지하는 位相은 구별된다. 우선 始祖廟의 제례 대상인 동명은 夫餘族 일파인 건국 집단이 高句麗와의 경쟁의식 속에 그들과 필적할 만한 혈통 및 사상적 위상을 갖추는 과정에서 凡夫餘族의 始祖를 백제 시조로 삼았던 결과이다. 비록 동명묘가 한화의 과정에서 설치된 구태묘에 의해 일시 대체되기도 했지만, 동명에 대한 시조 인식은 『隋書』 百濟傳과 『續日本紀』 등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백제 멸망기까지 대부분의 지배집단에 의해 공유되었다.
7세기 초 편찬된 『周書』·『隋書』 등 중국 北朝系 사서에만 보이는 始國者 仇台는 부여사상 최초의 始封之君인 尉仇台이다. 백제 聖王은 泗? 遷都와 더불어 南扶餘로 개칭하고, 漢化 政策의 일환으로 梁으로부터 『三禮』를 받아들여 중국적 宗廟를 설치하는 가운데 구태를 시국자로 추대하며 구태묘까지 세웠다. 그리고 당시 중국과의 활발한 외교 관계 속에 이 사실이 강조되어 『주서』 등에 기록될 수 있었다. 그런데 구태는 『삼국사기』 편찬자들의 평에서 알 수 있듯이 국내 기록에 행적이 남아 있지 않다. 이는 위구태가 백제사상 실질적인 건국자와 직결될 수 없어, 지배층의 전반적인 동의를 얻지 못해 멸망 이전 시국자로서의 위상을 상실한 결과이다.
국내사서에만 등장하는 온조는 近肖古王代를 하한으로 하는 역대 왕들의 일부 치적이 온조의 업적으로 가탁된 점과 『書記』가 근초고왕대 편찬되었음을 감안하면, 이때 온조를 건국자로 삼는 관념이 정립된 것으로 여겨진다. 비록 관념상의 시조 동명과 외교적으로 강조된 시국자 구태의 존재로 의해 중국에 알려지지 못했지만 온조는 멸망기까지 실재적 위상을 유지하였다. 그러므로 멸망 이후 국내 기록에 사적이 남아 『三國史記』 등에 건국자로서 기록될 수 있었다.
결국 백제 왕실은 관념상의 시조 동명과 실질적인 건국자 온조가 공존하는 二元化된 시조 관념을 멸망기까지 소유했다. 중국적 종묘제의 도입 속에 일시적으로 부여사상 시봉지군인 위구태가 시국자로 채택되기도 했지만 널리 인정받지 못했다. 최종적으로 백제의 실질적인 건국자로서 사적 위상이 확고한 이는 온조였다. (필자 요약)